2015/07-08 : 지금 필요한 광고에 대하여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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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필요한 광고에 대하여


박 두 현

미디어플래닝1팀 차장 / doo.park@hsad.co.kr




‘포템킨의 마을’라는 은유가 있다. 사회주의 선전영화로 더욱 유명한 <전함 포템킨(The Battleship Potemkin)>의 포템킨과 같은 이름이지만, 영화의 유명세와는 다른 식으로 포템킨은 악명 높다.

포템킨은 본래 제정 러시아 시대 장군으로, 당시 러시아의 관할로 막 편입된 크림반도의 총독이기도 했다. 1787년 어느 날,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2세가 배로 포템킨의 관할 구역인 크림반도 지역을 순찰하게 됐는데, 이 때 포템킨은 여제의 마음에 들고자 하나의 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치정을 통해 발전된 크림반도를 자랑하고자 당시 가난하고 굶주린 마을들을 두꺼운 종이에 그린 근사한 건물 그림으로 덮어 위장했다. 그 뿐 아니라 그 건물 그림들을 배의 움직임에 맞춰 계속 옮겼다고 한다. 그 눈물겨운(?) 정성이 통했던 것일까, 포템킨은 결국 여제와 연인으로까지 발전했으며 그 권력을 바탕으로 흑해 함대까지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은 일견 훈훈한 성공이지만, 역사에 남은 포템킨이라는 이름은 실속 없이 포장만 잘 된 것들을 일컫는 웃음거리의 대명사가 됐다<그림 1>.


감동에 대한 지지가 브랜드에 대한 지지인가

나는 이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광고’를 떠올린다. 포템킨의 위장술처럼 대부분의 광고는 불편한 사실을 얘기하지 않는다. 불편한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통신요금의 구성 요소, 차량의 안전 기준, 금융의 수익 구조, 먹을거리 재료가 만들어진 과정 등은 합리적 구매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요소이지만 브랜드 입장에서는 반드시 숨겨야 하는 것들이다. 중요 요소가 빠진 광고는 자본의 명령에 따라 위장된 이미지들로 브랜드를 반복해 주입하고, 유명한 연예인 모델이 맹목적으로 추천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포템킨이 위장시킨 마을처럼, 핵심 속성을 알려주기보다는 여제의 마음에 들기 위한 치장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18세기의 어수룩한 여제와 똑똑해진 현대의 소비자들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현대의 소비자들은 여제와는 달리 브랜드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간다기보다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너그러이 속아주는 공범에 가깝다. 이미 희미하게나마 숨겨진 사실을 알고는 있으나 모르는 척 해주는 것에 익숙한 탓이다. 때문에 한 번 더 웃을 수 있고, 별 생각이 들지 않는 코미디나 콩트 같은 광고가 사랑받는 맥락도 비슷하다.

공범으로서, 굳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것에 대한 열광말이다. 그러나 이 얘기는 적어도 TV가 모든 매체를 지배하던 시절까지의 얘기였다. 지금은 모바일 인터넷이 TV광고 시간이라는 빈틈을 채우고 있다. 모바일 인터넷 상에서 소비자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자본에 의해 강요하는 광고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터넷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나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잊고 지냈던 무관심을 관심의 영역으로 올라오게 만든다. 즉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던 정보들이 내가 선택해야 하는 정보가 된다는 뜻이다. 더욱이 과거에는 가장 세련된 영상을 통해 ‘보여주기 방식’으로 차별화됐던 광고는 지금처럼 기술의 발달로 자극의 방식이 다양하고 복잡해진 현실에서는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한 마디로‘ 기존 광고 형식의 위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근 나오는 디지털 기반 광고들의 방식은 꽤 흥미롭다. 우선 암울하고 불안한 현실을 광고 속에 제시한다. 어깨가 축 처진 아빠, 스펙 쌓기 경쟁에 지친 청춘, 소외 당하는 아이들은 대표적인 현대사회의 피해자 모임이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재료로 던진다. 그 과정에서 주로 완성되는 결론의 맛은 감동과 눈물이다. 이들을 엮어 브랜드와 연결시킴으로써 결국 ‘위로해 주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고객에게 전달한다. 특히 이들 광고는 SNS를 중심으로 소비자의 이성을 파고든다.“ 어, 뭔가 다른데!” 기존의 광고가 주지 못했던 자극에 매료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런 종류의 광고가 갖는 한계는 공감의 감정 그 이후다.‘왜 이 브랜드가 이런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던 감동 코드의 예능과 마찬가지로 이런 형식의 광고는 브랜드와 결부되기 쉽지 않다. 예능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 방송국이 고마워 팬이 됐다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진행자의 팬이 됐다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물론 그 때 당시의 예능은 방송국을 사랑해달라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여지, 바로 그것이 어린이 도서관이나 양심냉장고로 도출돼‘ 우리가 잊었던 시비지심’에 대한 공감을 이끄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디지털 주류의 광고는 그 목적을 알기 어렵다. 광고는 최소한의 광고다움이 있어야 한다. 자기 돈 들이겠다는 공익광고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감동에 대한 지지를 브랜드에 대한 지지로 잘못 해석하는 오해는 없어야 한다.


소비자는 속아주는 척 할 뿐 속지 않는다

이제 지금 필요한 광고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2011년의 어느 광고다.

‘어느 작은 농가. 돼지 한 마리로 시작한 이 농가는 자본의 흐름에 따라 커지고 기계화되고 공장화되어 가축들을 기르는 곳보다는 생산하는 곳으로 변모한다. 사육과 생산의 차이, 사료보다는 화학물질을 통해 비대해지고 빠르게 성장하는 가축들은 공산품처럼 대량으로 트럭에 실려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의 주인은 그 모든 비윤리적 생산체계에 대한 회의가 든다. 그래서 모든 생산시설을 가축들이 최소한 숨 쉴 수 있는 자유로운 농가로 바꿔 놓는다. 곧이어 나타나는 치폴레(Chipotle)의 식재료 차량이 그 농가에서 나온 가축들을 태우고 간다. 이 애니메이션에 맞춰 배경음악으로, 컨트리음악의 전설인 윌리 닐슨의 구성진 노래가 흘러나온다<그림 2>.’

치폴레라는 멕시칸 레스토랑의 광고,‘ 백 투 더 스타트(Back to the start)’이다. 아마 많이 기억하고 있을 유명한 광고인데, 그만큼 사회적 이슈와 브랜드를 잘 결부시킨 이상적인 광고 사례로 생각된다. 이 광고의 대단한 점은 소위‘ 레토릭’에 의한 단순한 메시지 전달 방식, 스토리 만들기 방식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

실제 치폴레는 좋은 먹을거리를 단 한 편의 애니메이션으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로컬에서 좋은 먹을거리를 위한 재단을 만든다거나 소비자들과 원재료에 대한 출처들을 얘기해왔던, 광고 이전의 단계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이들의 기본을 탄탄하게 만든 원천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당시에‘ Food Inc.’ 등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고발되고 있던 불편한 먹을거리의 저 너머 진실들을 회피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공감이 되는 이야기를 곧 나의 해결 방식으로 치환했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TV가 아니라 해도 디지털 상에서 충분히 회자되고 지지를 얻어냈다. 현재 치폴레는 7월 17일 기준 NYSE지수 661로 2011년 대비 2배, 그리고도 꾸준히 상승하는 주가를 기록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은 남에게 무언가를 빼앗기는 일이다. 특히 더 억울한 건 똑똑한 도둑보다 멍청한 도둑에게 빼앗겼을 때다. 사실 치폴레가 뒤에서 원가를 낮추기 위해 어떤 일을 벌이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보이는 것만큼은 매우 똑똑하다. 100% 투명한 착한 기업은 전설 속에나 나오는 얘기겠지만, 적어도 명백히 나쁜 일을 벌이는 기업, 그리고 그걸 다 알게 하는 멍청한 기업이 포템킨의 그림을 뒤집어쓰고‘ 이렇게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브랜드의 성장을 만들어 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무도 그런 뻔한 거짓에는 속고 싶어 하지 않는다.

TV 시대에는 그래도 그런 속임수가 좀 통했다.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매체니까 그냥 모델이 추천해 주면 사서 해보고 아니면 말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매체환경이 복잡해졌다. 특히 TV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매체의 보편화는 무관심한 척 볼 수 있는 광고의 종말처럼 여겨진다. 이제 거짓은 반드시 회피되고, 정도가 심한 노이즈 마케팅은 그냥 땅을 파고 무덤에 들어가는 꼴이 된다. 포템킨은 어쨌든 그 시대에 성공했다. 여제의 연인이자, 막강한 해군의 수장으로. 그러나 그가 지나간 길은 지금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음을 기억하자.

광고회사는 적어도 객관적인 답변을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회사다. 가난한 마을을 가리고 싶다는 광고주의 가벼운 고민을 받아들여 더 멋진 그림을 그려드리겠다는 경쟁은 소비자가 배에 올라 화면만 보던 TV 시대의 이야기다. 지금의 매체환경에 익숙한 소비자는 저 가난한 마을 한가운데를 이미 꿰뚫어보고 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