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3-04 : Special edition - 혼성모방으로 초현실 속의 정체성을 자극하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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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향수>

  혼성모방으로 초현실 속의 정체성을 자극하다

윤선희
I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syoon@email.hanyang.ac.kr



‘향수(鄕愁)’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이 아니다. 기억이란 지나간 시간의 사건을 그대로 머리 속에 복사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일정한 선택을 전제한다. 희미한 기억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향수란 지난 시간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건과 감성 속에서 특정한 부분만이 도드라져 우리 뇌리에 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40, 50대 세대들이 어린 시절 70, 80명이 득실거리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영하 18도의 추위를 교실 한복판 조개탄 난로에만 의지하여 참아내고, 간식거리 하나 없이 옥수수빵을 타서 서로 나눠 먹었던 당시의 현실은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혹독했을까. 그러나 이들은 혹독한 추위나 속 쓰린 굶주림을 기억하기보다는, 기억 저편에 오렌지빛 필터를 끼우고 순수하고 따뜻했던 어린 시절을 낭만적으로 향수한다.

이렇듯 향수란 과거의 기억이 아닌, 시간을 거꾸로 세운 환상이다. 향수 속에서 인간은 실제 존재했던 자신이 아닌, 기억의 파편들을 선택적으로 조합하여 아련한 이미지로 색칠한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적당히 세속적이며 거짓되고 좌절한 현재, 현실 속의 나의 모습과는 다른 순수의 시절로 기억되는 ‘환상 속의 나’의 모습이다.
총채, 작은 LP판 등 현재성에서 사라진 과거의 시간을 표상하는 소품을 진열하고 삼각보자기를 뒤집어 쓴 버거 소녀가 유리창 너머로 패스트푸드점의 값싼 상품들을 보며 감탄하는 광고가 있다. 그런데 이 광고가 표상하고 있는 것은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 아니다. 50, 60년대 발전되지 않은 사회의 궁핍한 현실의 묘사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는 값싸게 여러 가지 물건을 살 수 있었던 풍요의 시간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흔히 말하는 “그때가 좋았지”라는 과거의 향수는 실상 쌀 한말이 100원이었지만 그들의 소득도 만원이었다는, 과거 현실의 대차대조표를 그리지 않는 선택적 기억의 조합일 뿐이다.
인간이 미래의 희망을 가지고 삶을 개척해 나가듯이 과거의 향수, 즉 현실이 아닌 기억의 환상에 힘입어 정서적 안정을 가지고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동경(憧憬)에의 소구와 향수에의 소구

광고에서 과거는 다양한 방식으로 광고의 크리에이티브를 구성하여 왔는데, 가장 흔하게는 귀족적 이미지를 표상하기 위한 것으로 이용되었다. 클래식 음악과 훌륭한 미술품, 화려한 건축양식의 성 같은 고급문화(high culture)가 과거의 귀족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기법으로 활용되었다. 또 원근법으로 정연하게 구도화된 배경과 고상하게 다듬어진 이미지들은 보는 이를 압도하여 귀족적 취향을 갖기 위해 상품을 구입하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이는 향수가 아닌 ‘동경(憧憬)’이었다. 즉, 수용자의 기억 속에 한번쯤 경험했음직한 정서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아련한 향수가 아니라, 오히려 수용자의 기억과 동떨어진 조형적 아름다움으로 다가와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수용자는 광고에 나타난 귀족적 취향의 고급문화를 감상하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을 꿈꾸지만, 이때 자신의 모습은 환상의 한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귀족적 골동품들의 외곽에 존재하면서 하염없이 이를 동경하는 남루한 모습으로 전락시키는데, 광고는 그 냉소적 정체성에 소구한다.
그런데 이에 비해, 꼬질한 일상이 배어난 듯한 버거 소녀나 라면 집 앞에서 두꺼운 귀마개를 쓴 형제가 침을 흘리는 라면 광고를 보면서 수용자들은 동경이 아닌 향수를 느끼게 된다. 이는 그러한 과거를 경험한 사람들이나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신기하게도 모두 똑같이 느끼는 것으로, 광고를 보면서 수용자들은 광고 속의 인물과 상황이 자신의 경험의 일부인 것으로 느끼고 향수에 빠져들게 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들 광고들이 구세대가 아닌 신세대를 겨냥한 광고라는 것이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광고들은 40, 50대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10, 20대를 주요 타깃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어린 시절 총채를 들고 청소를 하지도, 음식점 앞에서 귀마개를 하고 침을 흘린 세대들도 아니다. 광고처럼 아저씨를 넘어뜨리는 우뢰메를 칭송하면서 자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고들이 10, 20대 젊은이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에게 생소한 과거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광고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설명이 일견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차원적 묘사에 그치지, 이들 광고가 왜 어필하게 되는지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적 혹은 크리에이티브 기법상의 논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광고를 보면서 자신이 경험한 것이 아니면서도 마치 경험을 한 듯한 정서적 공감대를 가지고 향수를 느끼는데, 이때 과거의 이미지는 아련한 기억 속에 아름답게 채색된 시간으로 기억된다. 순수의 시대, 풍요의 시대, 인정이 통하는 시대, 아름다운 시절로 선택적으로 기억되어 향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혼성모방(pastiche)의 크리에이티브 기법


향수 속의 과거는 ‘6.25 당시 마포 상인’ 같은 다큐멘터리 사진에 나타난 깡마르고 피폐한 삶에 찌든 현실적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두껍고 갈라진 두 손으로 무거운 광주리를 옮기며 핏발 선 목소리로 서로 다투는 남루한 서민들의 모습이 광고의 향수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향수라는 정서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만큼만 일상적이긴 하지만, 과거에 존재했던 삶의 고통은 광고 속의 과거에는 없다.
따라서 광고에 나타난 과거의 향수는 실제 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50년대쯤에 나온 것 같은 군고구마 장사의 귀마개를 쓴 형제들이 바라보는 유리문 너머의 라면 먹는 사람들은 ‘21세기의 인간’이다. 라면을 먹는 염색한 긴 머리의 남자는 바로 ‘지금’ ‘여기’라는 것을 강조하는 현재성의 기호인 것이다. 삼각보자기를 뒤집어쓴 무료한 버거 소녀 앞에도 휘황한 유리창 너머 지금의 패스트푸드점이 존재하고 있다. 우뢰메 3인조, 그 곡예도 불사하는 달동네 아이들은 첨단의 016 PCS로 세상을 다 가질 기세가 등등하다. 그 뿐인가? ‘채림. hihome.com’도 동네 건달들이 60년대 상점 앞에서 인터넷을 거론하고 있다.

이렇듯 광고 속의 향수는 과거를 그리지만, 실제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과거가 혼재됨으로써 시간의 개념은 없어지고 초현실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크리에이티브 기법상 포스트모더니즘의 표현 형식으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지러운 영상들의 빠른 편집으로 의미의 해체를 강조했던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광고에 비해, 최근 포스트모더니즘 광고는 촌스런 엽기 광고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표현 형식상의 특징은 페스티시(pastiche), 곧 ‘혼성모방’이다. 즉,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여 연속적 흐름을 거부하고, 공간적으로 진실과 거짓은 서로 뒤섞여 무엇이 진품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예술의 순수성조차도 가치를 잃어 키치(kitch)가 당당히 미술관에 걸리고, 예술의 아우라(aura)를 앗아간다는 복제품이 더욱 과장된 모습으로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면서 예술품으로 자리잡게 된다.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뚜렷한 구별도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힘을 잃게 된다. 고급문화를 나타내는 클래식 음악이나 르네상스 회화가 오히려 희화화되어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게 된다. 저급하다고 멸시되었던 뽕짝, 트롯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새로운 인기를 얻는 ‘이박사 신드롬’도 이런 경향의 반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형식에 걸맞게 현재 인기를 끄는 촌스런 광고들도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해체하고 혼성모방을 주축으로 구성되고 있다. 과거의 모습은 실제 역사적 과거가 아니며, 환상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기억이다. 이때 과거는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고 반드시 현재성과 공존하며 현재성으로만 규정된다. 50년대와 21세기가 상존할 때만 환상 속의 기억이 완성된다.
고급문화에 나타난 귀족적 취향이나 어떠한 현실적 권력을 거부하면서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에 귀착하고, 이박사나 우뢰메, 혹은 ‘별들의 고향’ 같은 저급문화를 마음껏 구가한다. 그러나 이들 광고에 나타난 일상성은 현실적 삶이 아닌 환상 속에서 꿈꾸어진 일상의 모습이다. 50, 60년대의 촌티 나는 일상의 모습에서 수용자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시간과 공간과 문화가 혼성 모방된 촌티 광고의 이미지를 통해 순수와 풍요와 인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자신의 정체성을 초현실 속에서 경험하면서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