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9-10 : 크리에이터@클리핑 - 당신은 지금 누구와 광고를 만들고 있습니까?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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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누구와 광고를 만들고 있습니까?
  이 현 종 CD
hjlee@lgad.lg.co.kr

<광고 1>
 
<광고 2>
 
 
<광고 3>
 
 
<광고 4 >
 
 
<광고 5>
 
 
<광고 6 >
 
 
<광고 7 >
 
 
<광고 8 >


<광고 9 >
 
 
<광고 10 >
 
 
<광고 11 >
 
나무들은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정현종, ‘나무에 깃들여’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처럼 자기가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를 한번도 떠나지 않고 일생을 마친 사람과, 미국 대통령 부시가 만난 사람들의 수를 비교해서 특별히 사회과학적으로 유용한 공식을 만들어 낸 사람은 아직 없지만 아마 성격과 직업 등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이리라는 것쯤은 불문가지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준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굳이 만난 사람들의 절대량과 정비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가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지만 어쩌면 ‘관계’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략보고서를 능가하는 통찰력과 직관
<광고 1> J.W Thompson, Leo Burnett, Raymond Rubicam, William Bernbach. 이 위대한 광고인들을 한 자리에 끌어 모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들의 무덤을 보여주며 그들의 죽음을 굳이 알리고 있는 이 광고는 Goldsmith/Jeffrey라는 뉴욕의 한 신출내기 대행사 광고였다. ‘붕어빵엔 붕어가 없다’는 식으로, 회사 이름을 만든 그 사람은 이미 가고 없는데 그래도 그 광고대행사와 일하고 싶으냐고 참으로 맹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Goldsmith/Jeffrey에는 문패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동일인이니 걱정할 것 없다는 식의 이 광고는 당시 업계로부터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비장미가 흐르는 흑백의 영상을 따라가다가 결론에서 마주치게 되는 유쾌한 독설은 다시 봐도 신선하다.
역사는 소수의 창조자들에 의해 진보한다고 했는가.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 1975)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광고의 역사 또한 이들 소수의 창조자들에 의해 깊이와 넓이가 더해 왔다. 사실 광고는 협업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몇몇 크리에이터들의 통찰력과 아티스트들의 직관이 수많은 조사자료와 전략보고서를 능가할 때도 있다. 브랜드와 소비자의 관계는 남녀관계와 유사한지라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특별하고 은밀하기도 하다. 그래서 감정을 다룰 줄 아는 그들의 섬세한 손길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이 광고를 만든, 그리고 Goldsmith/Jeffrey의 주인이기도 했던 Gary Goldsmith(현 Lowe Lintas & Partners 뉴욕의 chairman / chief creative director)도 이런 소수의 창조자 반열에 늘 자신을 올려놓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서는 건축을 전공했었습니다. 광고는 먼 나라 얘기였지요. 사실 좀 천박하고 재능을 낭비하는 짓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외판원보다는 조금 나은... 그에 비하면 건축은 고상하고 의미있는 것이었지요. 일종의 순수예술이잖아요. 디자인과 일러스트는 오히려 조금 봐 줄만 했어요. 지금이야 그런 순수예술이나 건축 같은 분야들이 광고에서 수도 없이 사용되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옛날 가졌던 그 알량한 자만이 우습게 생각되기도 하지만요. 적어도 광고는 존재 이유로 볼 때 정직합니다.

마지막 학기에 학점 이수 상 어쩔 수 없이 광고 과목을 들었어요. 강사는 Y&R의 아트 디렉터 출신이었는데, 레너드 루빈(Leonard Rubin)이라고 25년간의 현직을 떠나 휴식을 취하러 텍사스로 내려온 분이었지요. 그는 Doyle Dane나 Scali and Ally의 위대한 필름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광고가 그렇게 시끄럽고 천박한 것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지요. 광고란 지적(知的)일 수도 있고, 도발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잘 다듬어진 예술품이 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전 몇 개의 광고도 만들었고 책도 엮어서 그에게 제출했는데 그만 조각조각 찢겨져 버리더라구요. 그는 아주 터프하고 냉혹한 비판가였습니다. 학기말에는 뉴욕 출신의 한 CD를 초빙했는데 그때가 클라이맥스였어요. 그가 오기 두 주 전에 레너드는 저에게 “이 프로그램의 스탠더드를 바꾸지 않는 한 너의 작품은 내놓을 수가 없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전 13일을 꼬박 새우며 처음부터 다시 책을 엮었어요. 그리고 레너드에게 다시 제출했습니다. 레너드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은 채 파이프를 길게 들여마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훨씬 좋아졌군.”

사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았거든요. 다음 날, 그는 절 앉혀놓은 채 다른 학생들의 작품들을 여섯 시간에 걸쳐 비판하더군요. 그때 전 마지막에는 결국 저의 작품을 펼치게 할 것이고 그걸 뉴욕으로부터 온 초빙인사에게 보여줄 것이고, 그러면서 이 전시적 강의는 해피 엔딩으로 마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렇게 안됐는데, 그게 오히려 잘 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졸업 후 전 댈러스로 갔고, 여기저기 면접도 보았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헤매다 당시 그 도시에서 제일 잘 나가는 CD이자 선생이었던 랍 로튼(Rob Lawton)에게로 갔습니다. 그는 저의 작품들을 세밀하게 뜯어보았는데 대단히 분석적이고 이성적이었습니다. 그 30분 동안 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리처드 그룹의 스탠 리처즈(Stan Richards)를 만난 게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절 고용하지는 않았지만 내게 학교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것을 권유했고 파사데나에 있는 아트센터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지요. 그렇게 해서 전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3년을 공부한 후 마침내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졸업 전에 우리는 가고 싶은 대행사 열 개를 리스트하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전 DDB만 열 번 적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1년 1월 23일 DDB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소통의 문제이다. 그리고 소통은 공감을 전제로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다고 후련해 한다면 그건 ‘무지 아니면 오만’,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라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라는 것들을 ‘그들이 듣고 싶은 얘기’로 바꿔주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기업 PR의 늪에서 한참 허덕이고 있던 그 해 눈앞의 미망을 거두어준 광고는 Sony의 ‘What’s next?’캠페인이었다. 첨단? 테크놀러지? 선도? 등등의 하품 나는 소리들이 어떻게 공감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돌변했을까.

Gary의 이 캠페인은 98년 One Show의 금상을 수상했다. 흑백의 스톡 사진들을 이용한 이 시리즈는 첨단을 표현하느라 스케일 있는 영상에 3D에 분주해하는 우리들에게 진실의 힘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준다. 그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소품은 ‘추억’이다. 카피를 읽어보자.
 
<광고 2>
아이들의 할아버지들은 장난감 트럭 때문에 싸웠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전기 기차 때문에 싸웠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리모트 컨트롤 장난감 때문에 싸웁니다. 앞으로 이 아이들의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싸우게 될까요?

그리고 맨 밑줄, 작지만 선명한 대답; ‘What’s next? Sony’가 핵주먹처럼 뇌리를 강타한다. 단정하고 분명하며 정직하고 따뜻하다.
<광고 3>
엄마의 할머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 앞에서 첫 키스를 했습니다. 엄마의 엄마는 흑백 텔레비전 앞에서 첫 키스를 했습니다. 엄마는 카 스테레오 앞에서 첫 키스를 했습니다. 앞으로 이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 첫 키스를 하게 될까요?

<광고 4>
50년 전에는 누가 비누 박스를 최고로 만들 수 있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지금은 누가 웹 사이트를 최고로 만들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무엇을 최고로 만들어야 할까요?

<광고 5>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편지로 재미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전보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서로의 얘기를 재잘댑니다. 이 아이들의 아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즐거움을 나눌까요?
 
전 매우 단순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저 여자라면 미쳐 볼 만 하겠다’ 싶으면 좀처럼 다른 일에는 신경을 못 쓰지요. 특히 광고가 그런 것 같아요. 무언가를 잘 하려고 한다면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 있어야 되요.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이 그때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당신 자신을 확신시켜야 합니다. 제 경우엔 반만 잘 하려고 해도 완전히 그것에 빠져버려야만 되는 것 같아요. “벌써 새벽 2시야. 가서 자는 게 어때. 어차피 광고가 다 그런 거잖아...” 이런 이성적인 목소리와도 싸워야만 하고요. 어떻게 보면 좀 바보 같은 확신을 가져야 되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세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큰 일이다’라는 확신 같은 거 말이에요. 사랑, 탄생과 죽음... 뭐 그런 것들과 비슷한 가치로 생각한다면 광고라는 행위도 형이상학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형이하학적인 문제로만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깐느 심사위원장, One Club 회장 등을 거쳐 현재 세계 광고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거물이 된 Gary는 지금은 고인이 된 헬무트 크론(Helmut Krone)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난 97년 작고한 헬무트 크론은 그 유명한 폴크스바겐의 카피라이터 케니그(Julian Koenig)과 함께 DDB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전설적인 아트 디렉터였다. ‘Less is more’라는 그의 이념은 광고 아트 디렉션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으며 이후의 광고 표현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감정에서든 사실에서든 반드시 진실해야
80년대 초 DDB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정말 전설적인 광고인들이 즐비했습니다. 번벅 (Bill Bernbach) 씨도 살아 계셨으며 가끔은 일도 하셨지요. 로이 그레이스(Roy Grace)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고, 밥 게이지(Bob Gage)와 헬무트 크론도 여전히 캠페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카피라이터 중 한 사람이었던 밥 레븐슨(Bob Levenson)도 있었지요. 처음엔 게이지의 어시스턴트로 고용되었기 때문에 헬무트와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적었습니다. 그는 자기 방을 나가는 일이 거의 없이 혼자서 뭔가 작업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관리자로서의 의무가 없었지요. 그래서 전 제 작품을 그에게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거구요. 제 기억에 어느 날인가 잠깐 홀에서 마주쳤는데 짧게 제 소개를 하고 몇 마디 부드러운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오랫동안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후 전 제가 만든 폴크스바겐 캠페인을 들고 그의 방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광고물들을 흰 카펫 위에 죽 펼쳐놓고 담배를 한손에 든 채 한참동안 광고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지요. “음~ 당신이 맞을 수도 있겠군.” 그리고 그는 약간의 디테일을 만졌을 뿐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공적인 일에서나 사적인 일에서나 헬무트는 말을 거의 하지 않음으로써 말에 무게가 실리게 하는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었지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와 지내면서 전 그를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교적인 스타일이 아니었고 저도 그랬기 때문에 잠깐 잠깐 만나는 식이었어요. 헬무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은 것처럼 저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제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지배적인 트렌드에 늘 반기를 든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만든 트렌드조차 허물어버리기를 좋아했죠. 하나의 전형을 만들고 그것으로 유명해지고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게 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고유의 아트워크로 정상에 선 후 거기서 빠져 나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사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그는 몇 번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를 얘기할 때 명쾌한 그래픽, 단순함, 그리고 완벽한 디테일 등으로 요약하는데, 그건 그를 잘 모르는 겁니다. 헬무트의 관심은 늘 ‘새롭고도 정직한 방법으로 말하기’였습니다. 나머지 실행상의 방법론들은 그야말로 그 아이디어를 옮기기 위한 최적의 도구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광고를 벽에 걸어놓고 3미터쯤 뒤로 물러나서 봤을 때 그 광고가 전에 해왔던 캠페인 속의 한 광고로 금방 인식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광고주가 누구인지도 금방 알아챌 수 있어야 합니다.”
전 아직도 이 방법에 기초해서 광고물들을 평가합니다. 그의 직업관 또한 제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순의 나이에도 그는 대학을 갓 나온 신입사원들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오래 일을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천부적 재능이나 천재성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헬무트도 남들과는 다른 비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났음에 틀림없지만 그걸 최대치로 끌어내기 위한 그의 노력은 실로 한계에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습니다. 그것도 30년 동안을....

<광고6> <광고7> <광고8>
복싱용품으로 출발한 세계적인 스포츠웨어 전문 브랜드, 에버라스트의 95년도 캠페인. Goldsmith/Jeffrey시절, Gary가 아트 디렉션을 담당했다.

한때 ‘사농공상광(士農工商廣)’이라는 말이 떠돌던 적이 있었다. 이리 볶이고 저리 채이던 어떤 광고인이 내뱉은 자조적 한탄이었겠지만 의기소침도 이쯤되면 허물이 된다. 건축에서 광고로 방향을 바꾼 Gary의 생각은 그런 의미에서 귀담아 들을 만하다.

전 광고가 천박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모든 비즈니스처럼 광고라는 업종에도 천박한 사람들이 있을 따름입니다. 비즈니스로서의 광고는 목표에 관한 한 매우 분명하고 순수합니다. 그 목표는 바로 판매겠죠. 제품의 판매일 수도 있겠고 서비스의 판매일 수도 있겠고 때로 정치광고의 경우라면 그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를 결정하는 건 우리가 말한 것을 대중들이 믿어주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전 광고를 할 때 사실에서든 감정에서든 반드시 진실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광고가 분명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더라도 전달 방법에 있어 거짓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면 그 광고는 정직한 광고가 아니게 됩니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다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디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면 다’라는 생각은 어쩐지 서글프다 못해 무섭다. 감상적인 앵글로 우리 직업을 미화시킬 필요도 없지만 저급화를 스스로 조장할 필요도 없다. 커뮤니케이션의 저급화는 곧 사회의 저급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광고에 있어서도 약삭빠른 마키아벨리스트(machiavellist)들은 역시 경계의 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뉴욕에서 만난 앱솔루트 보드카의 아트 디렉터, 어니 앨로우(Arnie Arlow) 씨의 한마디는 우리 직업을 되돌아보게 한 인상적인 일침이었다.
“크리에이티브에 종사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수준을 높일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트적이고 세련된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물건을 팔 수 없다고 말하는 클라이언트가 있다면 앱솔루트 보드카의 예를 들어서 설득해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부여받은 재능(talent)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Gary의 아트 디렉션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광고 3편이다.
<광고9>, <광고10>, <광고11>

고급 패션몰, 바니스 뉴욕에 가을 컬렉션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광고인데, 여백의 감정과 시 같은 카피에서 질풍과 노도 같았을 여름의 추억들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이 광고를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품질이 곧 브랜드의 품질이라는 주장에 남의 손까지 빌려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바니스 뉴욕 가을컬렉션 광고카피 中>



코코아 버터로 얼룩졌던 쇼핑봉투와도
모래 언덕에서 날리던 연과도
기름 냄새 절은 햄버거와도
이젠 끝이군요.
서랍 속은 조가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 바닷가에서 배구하던 친구들은 어디 갔나요.
수은주는 점점 가을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젠 이별을 고할 때.
싸구려 선글라스에게도
왁자지껄 떠들던 우리들의 선술집,
‘금요일의 우정’에게도
그리고 밤마다
그을린 등에 붙어
불면의 밤을 제공했던 저 모래 알갱이들에게도...
아, 모두 다 떠나갑니다.
한없이 가라앉는 이 마음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요?

새 옷.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