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인이 읽어주는 클래식 음악: 장인은 도구를 가린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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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목수가 연장만 나무란다(Bad workers always blame their tools)"

재주나 실력 없이 장비 탓만 하는 사람을 흔히 일컫는 서양 속담입니다. 하지만 많은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에게 있어 연주의 도구인 ‘악기’는 연주자의 경쟁력 그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뛰어난 연주자일수록 좋은 도구를 가려 쓰는데 더 집착하곤 합니다. 그렇기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연주자 중에 악기가 형편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소위 명기(名器)라 불리는, ‘악기’라기 보다는 장인의 손에 의해 탄생한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최고의 악기가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 첼로 같은 현악기의 경우 악기의 특성상 제작된 지 300년은 지나야 제 소리가 나기 때문에 연주자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17~18세기 장인에 의해 제작된 극소수량의 악기 ─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더라도 뉴스 등을 통해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나 과르네리 델 제수(Guarneri del Jesu) 등의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 들이 수억, 수십억을 호가하는 초고가에 거래되는 실정이고, 때문에 형편이 닿지 않는 몇몇 현악기 연주자들은 대출을 받아 악기를 구매하거나 후원 단체를 통해 대여를 받기도 합니다. 

 

▲지난 2011년 당시 최고가인 172억원에 경매에서 낙찰된 1721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현악기는 오래 묵을수록 좋은 소리를 낸다고 알려져 18세기에 제작된 소위 명기라 불리는 악기들은 그 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치솟고 있다.  (이미지 출처: Tarisio Auctions, Wikipedia)

좋은 악기에 투자한다는 것은 곧 좋은 연주라는 성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프로 연주자들은 큰돈을 들여서라도 좋은 악기를 손에 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아직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젊고 유망한 연주자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큰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는데요. 일례로, 지금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반열에 오른 클라라 주미 강(한국명 강주미)은 약관의 유망주이던 시절 악기 구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LG생활건강 화장품 브랜드 ‘숨’의 광고 모델로 활동한 이력이 유명하지요.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항상 스타인웨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많은 연주자가 좋은 악기(바꿔 말해 엄청 비싼 악기)를 마련하기 위해 대출이나 후원을 받거나, 심지어 투잡(?)을 뛰는 분투를 하는 와중에 악기 구매의 속박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운 연주자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부류가 바로 성악가와 피아니스트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성악가는 자신의 몸이 곧 악기이기에 악기 구입을 위해 고가의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고 싶다고 살 수도 없고요. 또 하나, 많은 분이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피아니스트 역시 악기 구입의 스트레스로부터 조금 자유로운 편입니다. 물론 피아노도 최상급의 영역으로 올라가면 ‘억’ 소리가 우습게 나옵니다. 일례로, 연주회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 콘서트용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 그랜드 피아노의 경우 대당 2~3억원 선에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고가의 현악기보다야 저렴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접근 가능한 가격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피아니스트가 악기 구입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말하는 까닭은 연주자 개인이 이런 고가의 피아노를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인데요. 이유인즉, 실연(實演) 무대에서 사용될 피아노는 어차피 대부분 연주회장 측에서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피아니스트 개인이 소유한 악기는 현악기나 혹은 목관, 금관악기 연주자들의 그것처럼 고가일 필요가 없고 일상적 연습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면 충분한 것이죠. (물론 금전적 여유가 충분한 피아니스트들은 집에 고가의 그랜드 피아노를 보유하기도 합니다. 안될 이유는 없습니다.)

 

▲ 피아니스트들의 꿈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전 세계 거의 모든 공연장에서 콘서트용으로 사용되는 피아노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정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악기다.  (이미지 출처: Mypouss, Steinway à Leipzig, Wikipedia)

물론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합니다. 까칠하고 예민하기로 악명 높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침머만(Christian Zimerman)은 공연장에서 제공하는 피아노가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없다는 생각에 연주 때마다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비행기에 실어 공수하는 극성을 부리기로 유명하지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특히, 집이 그리 넓지 않은 유럽의 경우 프로 피아니스트라 할지라도 집에서 연습하는 악기는 한국 가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업라이트(upright) 피아노를 사용하는 것이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피아니스트들이 너무 쉽게, 거저 음악을 한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 역시 값비싼 개인 악기를 소유하기 위한 금전적 스트레스로부터 다른 연주자들보다 아주 조금 자유롭다 뿐이지, 공연 현장에서 연주하게 될 악기에서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집착은 다른 여느 음악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 예외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매번 피아노를 싣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침머만의 유난스러움 역시 그의 소리에 대한 집착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다만, 피아니스트의 경우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 좋은 피아노 외에도 필요한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로 숙련된 기량을 갖춘 조율사(piano tuner) 입니다. 연주자가 직접 본인의 악기를 조율하는 여느 경우와 달리 피아노는 제 소리를 내기 위해 반드시 전문 조율사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집착, 장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출발점

아무리 값비싼 피아노라도 조율사의 손길 없이는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어제 좋은 소리를 냈던 피아노도 오늘의 연주를 위해서 다시 조율을 봐야 할 정도로 민감하기 그지없는 악기가 바로 피아노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피아노는 엄청나게 복잡한 악기라 그 구조를 훤히 들여다보고 전용 도구를 이용해 220개의 현 하나하나를 조율 할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때문에 88개의 건반을 쉴새 없이 오가며 환상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피아니스트조차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조율’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회장 무대 한쪽에는 언제나 조율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세계에 자랑할만한 피아노 조율 장인이 있습니다. tvN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도 출연한 바 있는 예술의전당 전속 조율사 이종율 명장입니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침머만과 한국의 자랑 조성진의 피아노를 조율한 조율사로도 유명합니다)

지난 2010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상영된 바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노 매니아(Piano Mania)」는 한 피아노 조율사가 최고의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를 그의 일상을 따라가며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잠깐 영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피아노 메이커 스타인웨이의 수석 테크니션 슈테판 크뉘퍼(Stephen Knüpper)는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Pierre-Laurent Aimard)의 요청을 받고 피아노 조율 작업을 맡습니다. 에마르는 곧 바흐 최후의 대작 「푸가의 기법(The Art of Fugue)」 새 앨범을 녹음할 참이었습니다. 에마르는 녹음을 앞두고 슈테판과 미팅을 하며, 자신이 원하는 소리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늘어놓습니다. 곡에 따라 하프시코드의 느낌이 나기도 하고 오르간의 느낌이 나기도 해야 한다느니 따위의 엄청나게 복잡한 주문을 합니다. 에마르의 얘기만 듣고 있으면 이 예민하고 깐깐한 피아니스트가 만족할만한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세상에 존재할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주문을 받은 슈테판의 소리에 대한 집착 역시 클라이언트 못지않습니다. 에마르가 원하는 피아노를 찾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에 위치한 스타인웨이 본사를 찾아 여러 피아노를 테스트해보기도 하고, 녹음이 예정된 빈의 연주회장 곳곳을 탐험하듯 돌아다닙니다. 그의 조율 실력은 음악의 나라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데, 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해머 헤드의 폭이 정상치보다 불과 0.7밀리미터가 작은 것도 눈대중으로 찾아낼 정도입니다. 결국 에마르는 슈테판이 섭외하고 조율한 피아노로 성공적으로 바흐 푸가의 기법을 녹음합니다. 이후 이 음반은 클래식 레이블 도이체그라모폰을 통해 출시되어 또 하나의 「푸가의 기법」 명 음반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영화 「피아노 매니아」 공식 트레일러 (출처: First Run Features 유튜브). 바흐 앨범 녹음을 위해 의기투합한 한 피아니스트와 피아노 조율사의 최고의 소리를 찾기 위한 광기와 집착, 장인정신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노 매니아」. 하나의 예술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집착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슈테판은 세계 정상급 피아니스트들의 공연에 앞서 찾는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이지만, 막상 피아니스트들에게 자신이 작업한 피아노를 연주해보라고 하고, 어떻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답한다고 합니다.

 “글쎄요……”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는 만족을 모른다는 것이죠. 그저 더 좋은 소리, 더 좋은 터치감을 만들어 줄 것을 슈테판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궁극의 도달점이 어디인지는 피아니스트도 슈테판 본인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할 뿐입니다. 미친듯한 완벽에의 추구, 그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궁극적인 목표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부제, <Love, Perfection, and a Touch of Madness>는 이러한 음악인들의 장인정신을 한마디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열정과 때론 답답할 정도의 타협을 모르는 고집스러움이 바로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이들의 매니악한 집착과 프로 정신은 광고라는 악기를 통해 고객들의 마음을 울리는 소리를 만들어나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