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7일, 오픈AI의 이사회는 CEO 샘 알트만을 해고합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CEO를 갑자기 해고한다고? 해고 이유는 초인공지능의 통제 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는 상황에서 Chat GPT의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샘 알트만은 이미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한 마이크로소프트와 자사주 매각을 기다려왔던 직원들을 뒤에 업고, 며칠 만에 CEO로 복귀하였습니다. 샘 알트만의 위치는 이전과 같지만, 이제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이사회는 와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큰 자본이 투여되는 인공지능 개발 사업이 과연 통제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습니다.
AI 기술의 급속 성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제할 수 없는 상수라면, AI가 만들어낼 사회에 맞게 바뀌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환경에 맞게 적응하며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을 ‘진화’라고 부릅니다. 진화가 ‘기존 대비 더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진화의 방향성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적 사고를 AI에 위임한 인류는 서서히 뇌가 퇴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도 있습니다. AI 기술이 고도화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을 살펴보면서, 인간의 진화 방향을 가늠해 보겠습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플루토>에 등장하는 최고의 인공지능 로봇들.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은 휴머노이드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이 여러 로봇의 형태 중에서 굳이 비효율적인 휴머노이드를 선택한다고? 비효율적인 모습으로의 진화는 사실 매우 흔한 일이다. ‘난 이렇게까지 낭비할 에너지가 있거든!’ 하며 과시할 수 있는 외관은 성선택에 유리하며 결국 번식과 생존으로 이어진다. 고도화된 인공지능 또한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더욱더 인간 같은 로봇의 몸’이라는 사치를 부리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1. 가장 잘 납득하는 인간으로의 진화_ <사이코패스> 츠네모리 아카네
(하기 내용은 애니메이션<사이코패스 시즌1>의 내용을 기반으로 합니다)
‘민주주의’는 매우 비효율적인 정치 체제입니다.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위해 구성원의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하는 과정도 비효율적이지만, 그 합의 결과 또한… 생각할수록 한숨이 나옵니다. <사이코패스>의 배경이 되는 근미래의 일본은 AI에게 주요한 의사결정을 일임하여, 이런 비효율성으로 초래된 사회/경제의 위기를 극복합니다. 물론 다른 국가들 중 일부는 아직도 과거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의 우리가 다른 대륙의 내전 국가들을 바라보며 ‘저 나라들은 왜 아직도 저러고 있냐’ 생각하는 것처럼.
AI 시스템 ‘시빌라’가 지배하는 국가는 비효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주요 의사결정은 물론, 개인의 삶도 AI가 결정해 줍니다. 개인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AI가 배정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학업 경쟁, 직업 경쟁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사법시스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실, 범죄가 일어난 다음에,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그래서 시빌라 시스템은 인간의 ‘사이코패스(범죄 심리)’를 분석, 범죄를 저지를 사람을 미리 색출하여 사회에서 격리시킵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 TOP3에 무조건 들어가는 츠네모리 아카네. 상상을 뛰어넘는 잔혹한 현실을 계속 마주하면서도 절대 흑화하지 않는 그녀의 유연한 멘탈이 매력적이다.
<사이코패스>는 츠네모리 아카네가 범죄(가 일어날 것 같은) 현장에 투입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아카네는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어딘지 좀 허술해 보이지만, AI 적성검사에서 최상단에 있는 공안국의 감시관으로 부임합니다. 감시관은 실제로 범죄(예상)자를 체포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범죄자와는 접촉은 본인의 범죄 계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시관으로서의 아카네의 업무는 범죄자를 직접 체포하는 집행관들의 범죄계수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범죄 피해자 또한 정신적 충격으로 범죄 계수가 상승할 수 있습니다. 아카네는 범죄 계수가 극단적으로 상승한 피해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혼란스러워합니다.
<사이코패스>를 상징하는 무기 ‘도미네이터’의 피규어. 도미네이터는 시빌라 시스템과 무선 접속하여 총구에 겨눠진 인물의 사이코패스를 분석한다. 회복 불가능한 범죄계수가 나올 경우 대상자를 완전히 제거하는 무기가 되고, 그보다 낮은 범죄계수가 나올 경우 단순한 마취총이 된다. 범죄계수가 허용치 이내일 때에는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 실제 사이즈로 제작된 이 피규어는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측정된 범죄계수에 따라 형태가 변화한다. 이 정도면 150만 원짜리 장난감 총도 살만하지 않을까
완벽하게 효율적인 세계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AI의 범죄 계수 측정을 피해서 대낮의 거리 한가운데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범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쇼를 보는 것처럼 살해장면을 SNS로 퍼 나릅니다. 아카네는 유능한 감시관들이 범죄자의 심리를 쫓다가 결국 범죄 계수 상승으로 집행관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될 위험을 감수하고, 범죄의 진상을 파헤치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범죄의 흑막을 몰아넣는데 성공합니다.
자신의 친구를 인질로 잡은 범인을 눈앞에 둔 아카네. 하지만 친구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범인의 범죄 계수는 0을 가리킵니다. 아카네의 손에는 범죄자로부터 빼앗은 구식 총도 있었지만, 그녀는 작동하지 않는 도미네이터의 결정만을 기다립니다. AI의 결정 없이 무력한 아카네의 눈앞에서 친구는 무참하게 살해당하며, 범인은 유유히 빠져나갑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울부짖는 아카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아카네의 사이코패스는 무서울 정도로 깨끗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은 ‘왜 아카네가 AI가 공안국이라는 중요한 부서에 선발되었는가?’입니다. 아카네는 수사 과정에서 AI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참상과 허점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녀는 심정적으로는 그 결함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이성에 근거한 최종적인 판단에서는 결국 ‘납득’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사이코패스는 혼탁해지지 않습니다.
마침내 아카네는 범죄 계수가 측정되지 않는 ‘면죄체질자’라는 예외가 시스템에 어떻게 활용되는지, 시빌라라는 AI시스템은 어떤 결함 위에 세워진 것인지, 그 모든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카네는 시빌라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시빌라 시스템이 아무리 추악하더라도, 그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효율성에 납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카네와 같이 ‘AI가 지배하는 사회를 납득할 수 있는 인간’이 AI에 의해 선택받고, 인류는 그 방향으로 진화합니다.
두 개 작품에서 등장하는 AI의 모습. ‘전자두뇌’라는 말이 인공지능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지금 우리의 뇌도 일종의 전자두뇌이다. 인간의 뇌는 수많은 전기신호로 작동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간의 몸조차 전기적인 반발력을 통해 보고 만질 수 있을 뿐이지, 사실은 거의 텅 빈 공간이다. AI를 만드는 프로그램과 우리의 DNA설계도가 유사하다고 보고, AI가 사용하는 동력과 우리의 음식 섭취가 크게 다를 바 없다면, 과연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을 구분 짓는 결정적 요소는 무엇일까
2)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생식을 통한 진화_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쿠사나기 소령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1995)는 사이버펑크 SF 장르의 기념비적인 걸작입니다. 기술에 지배당하는 암울한 미래 세계를 그린 유명 사이버펑크 작품들(ex : 뤽베송의 <제5원소>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등)은 모두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공안 9과 소속으로 뇌와 척추 일부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사이보그화된 인물입니다. 그야말로 ‘뇌만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공각기동대>의 인트로 장면. 광학미체로 모습을 숨기는 쿠사나기 소령. 그리고 사이보그로서의 자신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상상한 꿈
이 작품에는 로봇, 첨단무기, 인공지능 등 다양한 미래 기술이 등장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기술은 바로 ‘전뇌화(電腦化)’입니다. ‘전뇌화’란 인간의 두뇌를 전자화시켜 즉각적인 데이터 송수신 및 처리가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전뇌화된 인간은 말과 글이라는 비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에서 벗어나 목에 있는 단자에 케이블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직접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만 있다면 광고회사의 업무는 80% 이상 줄어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직접 네트워크에 접속한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같이 해킹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인형사’라 불리는 해커가 나타나 인간의 뇌를 해킹해 모든 인생을 거짓 기억으로 조작하고 자신의 인형처럼 부리기 시작합니다. 쿠사나기 소령은 동료들과 함께 해커를 찾기 위해 수사를 하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습니다. 그때, 한 사이보그 생산공장이 해킹당해 여성형 사이보그를 한 개를 조립하게 되고, 그 사이보그가 교통사고를 당해 쿠사나기 소령이 있는 공안 9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사이보그는 자신이 인형사라고 말하며, 하나의 지적 생명체로써 정치적 망명을 요청합니다.
인형사의 망명 신청장면. 그는 자신이 방대한 정보 네트워크 속에서 스스로 탄생한 하나의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미래에 Chat GPT가 자신을 생명체라고 주장한다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쿠사나기 소령은 엄연히 인간으로 인정받는 존재이지만, 전신 사이보그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자신이 인간에서 유래한 것인지, 처음부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인지에 대한 의심은 인형사를 만나면서 더욱 증폭됩니다. 그녀는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인형사와의 접속을 시도합니다. 정부는 원래 외교적 해킹 프로그램이었던 인형사를 폐기하려 하지만, 쿠사나기는 처절한 전투 끝에 몸이 반파된 채로 인형사와의 접속에 성공합니다.
쿠사나기와 접속한 인형사는 쿠사나기가 자신을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쿠사나기를 찾아온 것임을 밝힙니다. 인공지능이 하나의 개체로서만 계속 유지된다면, 환경 변화에 따른 다양한 변수에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고등 생명체는 그런 이유로 이성 생식을 합니다. 두 유전자를 결합하여,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인형사는 자신이 인간인지에 대해 계속 의문을 품는 쿠사나기에게 함께 융합하여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군의 저격총이 쿠사나기의 뇌를 파괴해 버립니다.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융합 장면. 정리하자면,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생식 장면이다
쿠사나기는 절친 바토가 암시장에서 어렵게 구한 여자아이의 의체로 다시 깨어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과 같은 쿠사나기가 아니며, 쿠사나기인 척하는 인형사도 아닙니다. 그녀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로 진화하였습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연결된 방대한 네트워크가 계속 존재한다면, 그 생명체는 곧 이 사회의 지배적인 종이 될 것입니다.
<공각기동대>의 마지막 장면 방대한 네트워크를 바라보는 새로운 생명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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