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DDENBIRTH
‘일상기록’의 잉여시대
인터넷 세상에 우리가 쏟아내는 일상기록은 지나치게 꾸며지고 부풀려져 있다. ‘누군가’ 볼 것을 예상하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콘텐츠이다.
결국 자가검열을 거쳐 최종적으로 어딘가에 올린 사진들은 하나같이 타인을 의식한 삶의 조각이다.
누구나 '1인 미디어'인 시대.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잡히는 물건이나 풍경을 빼놓지 않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기록한다. 인터넷 세상에는 누군가 올린 비슷한 이야기와 영상이 넘쳐나고, 그것들은 활어처럼 누군가에게 읽힌다. 이름하여 '일상기록의 전성시대'다. 하지만 기록의 파도가 넘실댈수록 왠지 마음은 피곤해지고 버려야 할 기록물(쓰레기)은 쌓여간다. 왜일까?.
싱싱한 ‘일상’을 팝니다!
돌멩이로 동굴에 사슴과 들소를 그리던 크로마뇽인의 후손들은 이제 스마트폰이라는 최고의 무기를 손에 넣었다. 과거라면 캠코더를 사야 가능했던 동영상이, 카메라를 가져야 가능했던 사진이, 볼펜을 쥐어야 가능했던 글쓰기가 이제는 손 안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가능해졌다. 최근 스마트폰 가입자 수는 3천만 명, 둘 중 한 명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는 그야말로 일상기록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일상기록의 폭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쉽게 떠오르는 한 줄의 쪽지나 가계부, 블로그와 페이스북 등 모든 것이 기록수단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일상에 대해 늘어놓은 자기 감상이나 맛집과 여행정보, 어디서 퍼온 듯한 복사물 등이다.
‘기록’에 붙었던 일종의 허세가 떨어진 것은 몇 년 전부터다. 과거에는 기록이라고 하면 <조선왕조실록>이나 교과서를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 권력 중심의 역사관이 중시되던 시기의 시선일 뿐이다. 기억과기록경영연구소 손동유 부원장은 필자에게 기록의 흐름에 대해 이렇게 귀띔했다. "사람들의 일상이 역사의 근원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데, 특히 개인의 일상기록은 교과서나 역사책으로는 불가능한 소통의 기능이 있다. 가령 버스차장을 찍은 사진이나 어린 시절의 사진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것처럼 말이다.”
서점에서도 일반인들의 기록 이야기가 가득하다. 대부분 비전문가의 시선에서 소소하게 적어간 일상의 이야기들이다. 최근 소광숙 씨가 세상에 내놓은 사진집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는 고3 딸의 모습을 매일같이 촬영한 엄마의 일상이다. 과거라면 ‘그딴 사진이나 글로 뭐해!’라면서 타박했을 이야기들이 상업적 물건이 됐다. 그러니까 이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번듯한 책자로 인쇄되거나 인기 블로그에 광고를 실어줄 정도로 특별한 재료가 된 것이다. 누군가 올린 일상, 그러니까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었고 어떤 일을 했다, 무엇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마치 싱싱한 횟감처럼 드넓은 인터넷시장에서 ‘조회 수’라는 화폐로 통용되는 셈이다. 싱싱할수록, 일상기록은 잘 팔린다.
일상을 토해내는 사람들
일상기록의 재발견은 꽤 매력적이다. 이제까지 가치를 두지 않았던 일상의 이야기 재조명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상의 기록이 단기간에 범람하면서 생긴 일종의 ‘피로감’이다.
우선,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행태를 좇아가면서 너무나 많은 일상의 기록들이 ‘복제되듯’ 세상에 넘실거린다. 누군가는 이미 돈으로 대접받는 이야기를 올리느라, 누군가는 그렇게 돈을 버는 사람들을 따라가기 위해, 또 누군가는 그저 습관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남긴다(실제로 포털사이트에 카페 000을 치면 거의 같은 각도로 찍은 비슷한 사진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무조건 남기고 보자’ 식의 기록습관은 수요와 공급의 그래프를 망가뜨렸다. 즉 우리가 매일 찍어내는 사진과 동영상을 채 처리하기도 전에 새로운 생산물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컴퓨터와 휴대폰을 열어보시라. 메모리를 가득 잡아먹는(?) 주범은 우리가 언젠가 찍었던,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의 기록이다. 당시의 심리상태는 아마도 이러했을 게다. '언젠가 필요할지 몰라’ 혹은 ‘우선은 찍고 보자’. 하지만 세상사 공짜가 어디 있을까. 습관처럼 찍어놓은 기록습관은 메모리 공간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우리가 매해 용량이 커다란 노트북으로 갈아타는 이유다).
불행한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글과 사진들을 언제 열어볼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쌓인 일상의 기록은 며칠 동안 여행을 다녀오면 원하지 않는 홍보메일이 가득 쌓인 것처럼 별 의미가 없는 잉여자료가 된다. 추억의 증거가 아니라 휴지통에 버려야 할 쓰레기다. 과하게 몸에 밴 기록행위도 불편하다.
여기서 잠깐, 며칠 전에 벌어졌던 3시간의 만남을 재생시켜보자. 이야기는 필자가 친구 A를 만났던 계동길에서 시작된다. 주요 출연진은 필자와 친구 A, 그리고 스마트폰이다.
제법 잘 나간다는 식당에 도착한 A는 가게 곳곳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고, 주문한 식사가 나오자 갑자기 필자에게 ‘스톱’ 사인을 보내며 식사를 제지했다. 주변을 열심히 정리한 A는 음식을 주인공 삼아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더니 다시 자신의 젓가락으로 면발을 들고는 필자에게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속뜻을 가늠하자면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뭐하고 있어? 빨리 나를 찍으라고!’
산책을 즐기면서도 그녀의 ‘찍기’는 멈추지 않았고, 자연히 우리의 대화는 짧은 면발처럼 계속 끊겼다. 상황이 이쯤이면 본업(만남)이 부가업무(기록)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셈이다. 주객이 전도된 듯한 꺼림칙한 상황이랄까. 아마도 이렇게 제작(?)된 일상의 기록은 그녀의 블로그나 카카오스토리에 복제돼 올려질 것이다(최악의 상황은 기존 사진들마냥 컴퓨터에 사장되는 것이지만). 물론 필자와 나눈 이야기가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가공되어서 말이다. 어째 느낌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일종의 심리적 노출증
여기에는 일종의 함정이 숨어 있다. 그녀가 남기는 일상의 기록은, 안타깝게도 쉽게 흘러넘치는 곰국마냥 인터넷에 떠다니는 비슷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누구나 늘어놓을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들, 똑같은 이야기의 지루한 반복이다. 마치 일상기록에 도돌이표를 채워서 사람마다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꼴이랄까.
이유는 간단하다. A가 기록에 투자한 시간과 관심의 총합은 남들이 투자한 시간과 엇비슷하거나 오히려 못하다. 당신의 기록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없었으며, 특별한 통찰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의 일상기록은 맥도날드에서 메뉴를 고르면 1분 만에 제공되는 패스트푸드와 비슷하다.
심지어 우리가 쏟아내는 일상기록은 지나치게 꾸며지고 부풀려져 있다. 최근 저마다 경쟁하듯 자신을 인터넷시장에 드러내는 행위는 일종의 심리적 노출증과 비슷하다. 쉽게 말해 우리가 기록하는 일상의 모습은 대부분 한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누군가’ 볼 것을 예상하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콘텐츠라는 사실이다. 자가검열을 거쳐 최종적으로 어딘가에 올린 사진들은 하나같이 타인을 의식한 삶의 조각이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사진마다 똑같이 고개를 숙인 얼짱 각도와 최대한 예쁘게 보이기 위한 포즈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심리적 노출증에 시달리는 걸까. 그것은 경제적 불황과 시대적 혼돈 사이에서 타인의 인정과 댓글에서 사회적 존재감을 찾기 때문이다. 언제나 개인보다 ‘우리’를 앞세웠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제 5천만 현대인으로 세포 분열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새삼 증명하고 싶어 하며, 그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Ctrl+C vs. Delete
그렇다면 이쯤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가 쏟아내는 일상의 기록은 과연 얼마나 진실한가? 나다운 이야기인가?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가? 보존할 가치가 있는가? 알다시피 국가기록의 가치등급은 역사의식과 보존방식에 능통한 평가원들이 담당한다. 하지만 개인의 일상기록의 가치등급은 오로지 당신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니 1인 제작자이자 평가원인 당신이 스스로의 기록을 검토해야 할 때다. 두서없이 남긴 사진과 동영상으로 메모리만 잡아먹기 싫다면, 남들과 비슷한 패스트푸드 같은 기록을 남기기 싫다면! 살짝 기준을 얘기하자면 그 일상기록 속에 당신의 시선이나 이야기가 얼마나 담겨 있느냐 여부다.
이종렬 생태사진작가는 한 강연에서 최고의 기록을 남기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하루에 한 장의 사진만 남겨라.” 아마추어 사진작가는 한 사물을 몇 장 찍으면 다음 대상을 물색하기에 정신이 없지만, 프로 사진작가는 하루에 한 가지 대상을 목표로 삼는다. 아마추어가 많은 사진을 찍지만 좋은 컷을 남기지 못하는 반면, 프로가 단 몇 컷의 사진에서 베스트컷을 찾아내는 원리다.
즉 대상에 대한 애정과 탐색이 필수이며, 기록은 그 마지막 행위여야 한다. 당신의 기록유형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이제 우리에겐 열두 개의 열매 중에서 단 한 개만이 남았다. 술 몇 잔으로 자축하기 전, 당신이 세상에 그동안 쏟아낸(혹은 컴퓨터에 잠들어 있는) 일상기록의 흔적을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
글이든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상관없다. 올해 탑승했던 기차표나 문화공연 티켓도 멋진 일상의 기록이 된다(기차표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뚜렷이 보여주는 증거물이니까).
역사의 속성이 그렇듯, 지난 시간을 좇는 과정은 ‘막연한’ 과거를 통해 스스로를 ‘구체적으로’ 통찰하고 음미하는 기회다. 만약 당신의 이야기 중에서 거품이 있거나 휴지통에 버려야 할 기록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가지치기가 필요하다는 뜻.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Ctrl+C(복사)’가 아니라 ‘Delete(삭제)’ 키인지도 모른다.
박지현
자유기고가 | true100@empal.com
엉겁결에 사보기자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여행기자로 일하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고, <여성조선> <행복플러스> <미즈내일> <Sulwhasoo>등에 글을 기고하면서 생활지식을 취재하거나 명사들과 수다를 떨었다. 제곱으로 수를 늘리는 주름과 살 때문에 우울해지다가 나이가 주는 삶의 지혜에 새삼 감동하는 빨강머리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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