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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의 파사디나 광장은 겨울인데도 햇볕이 따갑다. LA의 겨울이란 것이 그리 떳떳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다. 광장은 빈 도화지처럼 한적하다. 미리 촬영 허가를 맡아놓아 설정된 풍경이 차려진 것이기도 하지만 동네 자체가 그런 것이리라. 차분했던 광장의 공기가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촬영팀이 속속 도착하고 장비를 옮기고 세팅하느라 광장은 어느새 시장이 됐다. 5일 촬영은 꽤 긴 일정이다. 로케이션 헌팅부터 따져보니 집 나온 지 벌써 보름 남짓 된 것 같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이제 제법 얼굴이 익은 스탭들이 지나가며 아는 체를 한다. 가벼운 인사에 농담을 섞어 보내기도 한다. 얼굴들이 밝은 건 나에 대한 호의 보다는 파사디나 광장이 마지막 컷이기 때문이리라.(나도 안다.제일 좋은 감독은 잘 찍는 감독이 아니라 일찍 보내주는 감독이다.) 나 역시 몇 마디 농담을 던진다. 그 이상은 언어가 허락을 안 한다. 다행히 그들도 늘 그쯤에서 멈춰준다. 수 십 년째 영어가 그대로인 이유다. 그 때 밑도 끝도 없이 올해는 윤재성의 소리영어를 배워보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마침내 올해의 목표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는데 그것은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기도 하고 오랜만에 성실한 사회인이 된 것 같은 그래서 열심히 잘 살고 있다는 환각증상에 빠져 그랬던 것으로 생각된다. 누군가 지금 내 얼굴을 보면 아주 좋은, 그리고 아주 성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양지 바른 곳에 오래 앉아있다 보면 잠이 오거나 몽상에 빠지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옮겨갈 때쯤, 마침내 촬영 준비가 완료됐다는 고함이 들렸다. 다시 질서의 세계다. 내 얼굴은 금세 제 자리를 찾았다. 광장은 다시 한적해지고-물론 통제에 의한 것이지만- 모델만 홀로 서 있다. 광장을 가로지르는 모델의 이미지는 고속의 부감 샷 설정이다. 상투적이지만 미니멀하고 아름답다.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만이 그와 동행한다. 그림자는 아름답다. 그리고 나는 그림자를 좋아한다. 한참 보다 보면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는 묘한 느낌을 준다. 불을 볼 때처럼 말이다.(사실 불보다 그림자가 더 좋은데 그림자는 유머까지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촬영의 세계도 나에게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다. 촬영 컷들의 순서는 스토리의 순서와는 무관하다. 퇴근부터 하고 출근하기도 하고 산정상에서 야호외친 다음에 산행을 준비하기도 한다. 키스부터 하고 손 잡기도 한다. 뒤죽박죽이다. 촬영 조건에 따라 찍을 컷들의 순서를 배치하기 때문이다. 그걸 멀리서 들여다 본다면 과거 현재 미래가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뒤죽박죽 섞여 있을 것이다.(아니 인과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다. 미래가 과거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어쨌든 그곳에서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나 몽롱한 매력인가. 현장이 좋은 이유다. 하지만 늘 떠나지 않는 또 한가지 속내 하나는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어렵게 살까’이다. 파사디나 광장을 걷는 남자의 이미지가 뭐라고 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모여 죽기 살기로 뛰어다닐까. 참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다. 모든 인간의 문제는 방안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누가 말했는지 일단 그 말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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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