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인류는 자만해 왔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가장 완벽한 형태로, 즉 조물주를 닮은 형태로 창조되었고, 나머지 동물과 자연은 인간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환경일 뿐이라 생각했다. 지금의 우리는 인간이 단세포에서 아프리카의 원숭이를 거쳐 호모사피엔스가 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어쩌다 진화의 나무를 잘 탔을 뿐이다. 당연히 만물의 영장이라는 타이틀은 오버다. 하지만 우리에겐 자랑거리가 아직 하나 남아있다.
Homo sapiens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원래는 ‘현명하고 현명한 인간’이라고 sapiens를 두 번씩이나 쓴다. 인간의 최고 자랑거리인 ‘이성’의 존재를 어떻게든 강조하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인 듯. 그래, 우리의 몸은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우리의 영혼은 누가 뭐래도 가장 완벽한 존재야. 우리는 ‘이성적 인간’이니까. 인간의 마음에 대해선 여전히 창조론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인간은 끔찍할 정도로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들조차 말이다. 이성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사회과학들이 설계하고 예측한 결과가 가끔씩 치명적으로 틀려버릴 때 우리는 의아함에 빠지고 만다. 우리가 이성적 인간이라면 왜 항상 이렇게 어이없는 실수를 할까? 여기, 다위니즘적 아이디어를 도입한 통섭적 학문들이 약간의 힌트를 주고 있다.
진화심리학 ‘적응된 마음’
진화심리학은 이름 그대로 인지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의 이종교배를 통해 태어난 학문이다. 이들에게 인간의 마음은 우리의 상상처럼 하나의 자아 같은 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모듈로 구성된 복잡계이다. 각각의 모듈들은 특화된 기능을 하지만 상호 연결되어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며 작동된다. 마치 인간의 몸처럼. ‘마음’이라는 엄청나게 복잡한 집합체는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과 적응을 통한 진화라는 긴긴 과정을 거쳐 설계된 것이다. 각각의 모듈은 각기 다른 시간과 환경에서 적응되어 생겨났다. 어떤 모듈들은 우리가 아직 물속에 있었을 때부터 진화해 왔으며, 어떤 모듈들은 원숭이 계통과 완전히 갈라지면서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렇다고 인간이 이성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잖아? 적응의 과정을 통해 결국 인간이 놀라운 현대 문명사회를 이뤄낸 이성으로까지 진화한 거란 얘기잖아?’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진화’라는 과정을 이용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두 가지 허점이다.
진화의 두 가지 패러독스
첫째, 진화는 엄청난 시간을 소요하며 천천히 진행되는 변화의 과정이다. 우리가 아프리카를 떠날 무렵부터 지금까지 10만 년이 흘렀지만, 이 시간은 적응을 통한 중요한 진화가 일어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우주를 넘나들고 우리가 창조한 가상의 공간에서 활개 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지만, 우리의 마음은 10만 년 전 그대로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포식자를 피하고 음식을 찾고 원시집단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적합하게 진화된 ‘마음’이라는 도구로 급변한 현대를 겨우겨우 살고 있다. 그나마도 침팬지일 때보다 유전체가 1.5% 달라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를 인간으로 정의해주고 있는 많은 행동들, 언어·노래·우정들이 사실은 대부분 원숭이도 지니고 있는 마음의 모듈을 많이 빌리고 있는 것이다.
둘째, 진화라는 프로세스는 어떤 완벽함을 점점 추구해가는 발전의 과정이 아니라, 현재 당면한 적응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의 대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진화는 매우 빈번히 그저 임시방편으로, 땜빵을 만드는 식으로 진행된다. 때문에 진화의 산물 중 어떤 것들은 어이없을 정도로 엉성하다. 사족보행 시절의 그것을 땜빵하여 만들어져 결국 우리를 디스크에 시달리게 하는 허리가 그 한 예다. 인간의 마음 역시 땜빵으로 구성된 수많은 모듈로 구성되어 있어 때론 우리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선사하기도 한다.
시대착오적이고 엉성한 우리의 마음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조악한 도구를 가지고 살던 조상들에게 음식은 언제 구할 수 있는지 모를 것이었다. 따라서 최대한 열량이 높은 걸 무조건 먹어두는 게 생존에 유리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은 고기나 과일에서 얻을 수 있는 지방과 당분을 최우선적으로 좋아하도록 임시방편으로 적응되었다. 문제는 그 모듈이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먹을 게 넘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지방과 당분을 갈망한다. 그리고 절망하며 다이어트한다. 그리고 또 먹는다. 하아~ 필요한 영양에만 식욕을 느끼도록 완벽하게 진화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 의식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별로 이성적이지도 않고, 항상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를 언제라도 효용을 최대화 할 수 있는 ‘경제적 인간’으로 간주하는 고전경제학의 기본명제도 큰 오류다. 그래서 오늘날 행동경제학을 필두로 하여 진화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간의 불완전한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광고인에게 바치는 부록
그렇다고 치고. 그런데, 이런 광고/마케팅과 무관한 이론이 광고회사 사보에 실려야 되는 이유가 뭐냐고? 인간의 허술함을 아는 것은 인간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의 지각 모듈은 뉴스와 블로그를 보기 위해 진화된 것이 아니라, 열대의 사바나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적응된 산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에게 지각된 정보는 일단 쉽게 신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눈앞에 사자가 보이면 무조건 믿어야 하니까.
그리고 지각의 방법. 인간의 마음에는 합리적인 정보보다 원시적인 정보가 신념화에 유리하다. 생생하거나, 개인적인 것이거나, 일화적인 것들 말이다. 티머시 윌슨의 유명한 콘돔 실험을 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컨슈머리포트의 통계학적 연구결과보다는 콘돔이 찢어져서 여친 임신할 뻔 했다는 대학생의 일화를 믿는다. 브랜드 스토리와 같은 맥락이다.
나는 우리가 ‘인문학으로 품위 있게 광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멋진 악당이다. 우리는 인간의 엉성한 마음을 잘 이용해야 한다. 사례는 아주 많다. 하지만 이쯤 해도 악당 동료 여러분은 원시인 소비자들을 어떻게 속여먹을지 감이 오셨을 거라 생각한다. 더하고 싶지만 참겠다. 이미 원고 분량은 한참 넘어섰고, 또 농담은 길게 하는 게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