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3-04 : Special edition - 과거의 추억, 인공낙원, 가짜의 세계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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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와 문화역류>

  과거의 추억, 인공낙원, 가짜의 세계

최혜실
I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choi@mail.kaist.ac.kr




한 무선이동전화사의 광고는 참 인상적이다. 결코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는, 특히 촌스러움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남학생이 도시 빈민촌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힙합 바지에 원색의 셔츠를 입고 아주 심각한 어조로 2층을 향해 소리친다.
“아버지, 내가 누구예요?”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아버지는 1960년대 시골 아저씨같은 모습이다.
“나도 몰라”하는 아버지의 대답. ‘Na’의 동음이어(同音異語) 효과를 노린 이 광고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후속편들을 낳고 있다.
우주인 시리즈, 역시 촌티 패션의 남학생을 향해 2층의 아버지는 우주인이 어디 있냐고 소리치는데 바로 그때 우주선이 내려와 아버지를 죽인다. 만화영화를 방불케 하는 전투 장면에는 촌스러운 요소와 유아적인 요소가 어우러지면서 재미를 더한다.

일상으로 파고드는 ‘그때를 아십니까?’

최근 ‘그때를 아십니까’ 시리즈가 여러 분야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지금의 장년층이 어렸을 때, 연탄이 있고 교복이 있었던, 가난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는 방식들은 도처에서 보인다. 인형 작가들은 그 시절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볼이 유난히 통통한 아이들의 모습을 재현하기도 하고, 당시의 사진, 생활용품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심지어 1970년대의 학교 모습을 재현해놓은 카페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손님들은 교복을 입은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여고시절’, ‘하얀 손수건’ 등의 70년대 가요를 들으며 향수에 잠길 수 있다.

우리는 왜 21세기의 초엽에 서서 그 누추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도 벗어나고 싶었던 그 가난을 왜 아득한 그리움으로 회상하는 것일까?
아마 지금의 30, 40대는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겨울, 새끼줄로 매어 사오던 구공탄, 밤늦게 추위에 떨면서 거의 재가 되어버린 구공탄을 갈던 그 기억을. 연탄을 갈아야 하는 시점을 깜박 잊어버리고 아침에 번개탄의 매운 연기에 눈물 흘리며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들은 참으로 처연하다.

학교의 추억은 항상 추위와 함께 떠오른다. 조개탄의 난로 위에 겹겹이 쌓인 도시락과 조회시간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 얼어붙던 발, 모래바람, 그리고 삐걱거리던 책상, 의자들. 걸레를 빨 때 뼈끝까지 시리던 물의 차가움. 그건 항상 몸부림치며 벗어나고 싶어했던 가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보세’란 구호를 외치며 뒤도 돌아보려 하지 않았던 그 때, 그 곳을 우리는 왜 새삼스럽게 반추하는 것일까? 설마 이동전화 광고의 주인공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지금의 나를 형성한 과거의 그때 그곳을 찾아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예술의 원형으로서의 고향의식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하략)

정지용(1903~? 납북 서정시인)의 시, <향수(鄕愁>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이유는 단지 노래 가락이 좋아서거나 시인의 탁월한 역량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구절은 모든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유년기의 아련한 기억들을 아름답게 채색한다. 그곳에서는 황소의 울음도 금빛으로 찬연히 빛나고 예쁠 것도 없는 아내가 전설의 주인공이 된다.
가난했던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궁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보릿고개에 굶었고 행상이나 농사일 하러 가신 부모님들을 기다리기도 했으며 추위에 냉방에서 자야했던 기억도 있었을 것이다. 월사금이 없어서 선생님께 야단맞던 일, 도시락 대신 물로 허기를 채우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문학작품에서 유년기는 가고 싶은 곳, 잃어버린 꿈의 공간으로 설정된다. 모기나 빈대보다는 아름다운 별밤이나 하얀 눈이 묘사되고, 허기보다는 명절의 음식들이 먼저 기억된다. 이처럼 주인공의 유년 체험은 훼손된 세계에서의 선험적 고향이다.
고향의식이 예술의 영원한 소재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때문에 채색된 추억으로서의 과거의 가난은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위안으로 존재한다. 언제였던가, 선생님의 도시락 이야기 광고가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항상 두 개의 도시락을 싸와서 점심을 못 싸온 학생에게 주던 선생님은 자주 속이 좋지 않다시면서 나머지 도시락마저 학생들에게 주곤 하셨다. 그 학생들이 훌륭한 사회인으로 자라나서 선생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내용이 커다란 보리밥 도시락 옆에 쓰인 모 기업의 이미지 광고는 가난했던 시절을 겪었던 장년층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IMF 이후 이런 종류의 광고가 많이 등장한 이유는 어려운 시절을 기억하면서 이 시대의 고통을 극복하자는 의미일 수 있다. 지금 현실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얼마 전의 보릿고개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과거 가난을 헤치고 살아온 의지로 힘겨운 현실을 타개해 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도 벗어나고 싶었던 가난을 다시 즐기고 싶은 생각은 누구도 없을 터인데, 과거의 가난이 우리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유년기의 애틋한 추억에 있다. 그래도 훼손되지 않은 그 무엇이 있었다는 확신이 현실의 고난과 맞물리면서 극복하자는 의지로 증폭된다.

동창찾기, 그 사이버 공간의 향수.

유년 시절의 친구를 만나고 싶은 욕구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한데, 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최첨단 디지털 기술과 연합하여 놀라운 반향을 일으킨 것이 인터넷 동문찾기 사이트인 ‘아이러브스쿨(www.iloveschool.co.kr)’이다.
학교 동창을 찾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사이트에 들어가 자신의 사연을 적어놓으면 되는 이 사이트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지난 추석에 한 중소 도시의 술집에 술이 동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 있던 동창생들이 이 사이트에서 소식을 주고 받은 뒤 명절에 고향에서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온라인이 오프 라인과 상호작용하는 사이버 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전자 공간은 더 이상 현실 공간과 다른 유폐된 장소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투사되며 다시 현실을 변화시키는 공간이 된다. 전자 공간은 또 인간의 감정을 메마르게 하는 이상하고 위험한 장소가 아니라 옛 추억을 현실 속에서 실현시켜 주는 만남의 광장이다.

그런데 유년기 공동체에 대한 추억이 사이버 공동체로 모이는 동인(動因)이 되었다는 점에서 전자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흔히 전자 공간이 과거 그리스 아고라(agora)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를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직접 대화와 토론을 하면서 민의를 수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민주주의이지만 인구가 많고 땅이 넓은 나라에서 그것은 불가능한데, 인터넷의 네트워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전자 공간에서는 선(線)만 깔리면 물리적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한국에서 미국에 있는 사람과도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는 효과를 낼 수 있고 현대의 개인주의, 고립주의를 오히려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위에서 예로 든 사이트가 정말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래서 좀 과장하면 기술 발전이 인간다움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낙관론이 등장할 법도 하다.
그러나 전자 공동체는 유년기의 공동체와 완전히 같지 않다. 아이디(ID)를 사용하는 네티즌들은 여전히 익명이고, 채팅 공간은 직접 대화의 공간과 다르며, 여기에서 많은 오해와 불협화음이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분명히 존재하는’ 허구, 그 모호함의 이해는...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과거로의 복귀, 과거에 대한 추억은 과거 그곳으로의 완전복귀가 아님을 알게 된다.
70년대 고등학교를 그대로 재현시켜 놓은 카페를 가본 적이 있다. 나무로 된 책걸상과 칠판, 자전거는 우리가 학교 다닐 때의 물품들과 ‘똑같다’. 종업원들이 입은 교복의 하얀 칼라, 갈래머리도 그때 그 모습이다. 그러나 그 물품들이 바로 그때 그 공간의 물품들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모사품일 뿐이다. 우리는 그 모사품을 보면서 잠시 동안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 딱딱하고 작은 나무의자에 앉아 불편을 감수하면서 그 궁핍을 즐긴다. 결코 즐겁지 않은 그 환경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세계가 ‘가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두 시간 정도 궁핍을 겪고 있으면 우리는 21세기의 바깥 세계로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다. 즉, 안에서의 그 세계가 즐거운 것은 외부 세계가 풍요로운 21세기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그만큼 발달했고 사회가 복잡해졌기 때문에 우리의 학창 시절은 휴식의 장소로 빛을 발휘한다.
심리학 용어 중에 전진(progression)과 퇴행(regression) 이론이 있다. 전진하던 인간의 에너지가 일단 외계의 적응에 실패하면 무의식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다시 바깥 세계로 향한다는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나타나는 예로 수면이나 무의식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원초적 체험은 예술에서 용궁설화나 요나(Jonah BC8세기)의 이야기로 형상화한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沈淸)은 용궁에서 힘을 얻고 연꽃으로 떠올라 현실 세계에서 왕비가 된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사흘을 견딘 뒤 예언자가 된다. 특히 고래 뱃속에서 우리는 자궁의 이미지를 느낀다. 그곳은 뱃속의 태아가 빈틈없이 보호받으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휴식의 공간에 유년의 추억을 불러모아 무의식의 위로를 극대화한다. 새로운 전진을 위한 휴식의 공간에 유년기의 추억이 들어옴으로써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보호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촌티 패션에도 유년기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향수가 묻어있다.
큰 플라스틱 꽃핀, 노랗고 빨간 원색의 옷, 삐죽삐죽한 머리, 통이 좁은 바지들은 옛날 시골아이들의 모습처럼 비치기도 한다. 거기에 50년대의 양단 저고리 감으로 만든 원피스까지 대유행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패션은 고도의 세련됨과 계산 없이는 결코 소화해낼 수 없다. 즉, 첨단 멋쟁이들은 이 ‘가짜 촌스러움’으로 21세기의 도시를 유유히 산책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어느 사이에 안전한 인공낙원을 만들어놓고 즐기고 있다. 민속촌에는 조선시대 초가집, 기와집 그리고 사람들을 그대로 재현해놓고 있다. 그들은 이 공간이 현실의 그것과 다르다는 확신 속에서 유유히 산책하면서 민속음식을 맛본다.
내 마음의 유년기를 실재 공간에 가시화해 놓고 즐기는 이 놀이의 방식은 허구의 세계가 현실 공간에 존립한다는 점에서 가짜이기도 하고 진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술 같은 것에다 자신의 욕망이나 환상을 가두어놓고 즐겨왔다.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유년기의 향수를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 이루어놓은 이 향수의 공간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 속의 환상, 환상 속의 현실의 세계,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가상 공간의 상태와 같은 그 세계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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