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06 : 현실을 씹는 튼튼한 위장을 가지고 글쓰기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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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나 | PR팀 / hanna@hsad.co.kr
완전 피곤해서 잠든 납치범 간지를 내며 3년 째 별 일 없이 살고 있습니다.
 
 


더욱 더 세밀한 현실을 수집하기 위해 삶의 밑바닥으로 자맥질한 작가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세밀한 삶의 결을 헤아리면서 더 많은 대중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예술을 바라보는 공식은 체호프의 희곡과 그의 삶 앞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의 희곡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이라는 환상의 공간과 시간은 현실의 공간과 부대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로서의 극작가
한 남자가 있다. 1904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마흔 넷이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후에 병원을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7년 동안 약 400편 이상의 유머소설과 콩트를 닥치는 대로 썼다.
그의 삶은 결코 유머러스하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글을 써서 생을 유지하던 그는, 그가 썼던 짧은 글만큼이나 짧은 생을 보냈다.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해 의사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의사로서의 삶은 병마와 싸우던 환자의 삶으로 끝났다.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 희곡 <갈매기>(1896)·<바냐 아저씨>(1897)·<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4) 등의 걸작과 함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가 글을 쓰던 ‘책상’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밥상’ 이었다. 오늘날 체호프의 희곡은 연극인들의 ‘밥’이 되고 있다. 만만하다는 의미의 밥이 아니다. 국내외 많은 연극인들은 그의 연극 언어를 먹고, 살아간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대학로 및 대형 아트센터에서 5편이 넘게 각기 다른 연출로 체호프의 극이 공연되었고, <갈매기>·<세 자매> 등을 소스로 창작된 시미즈 쿠니오의 <분장실>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몰락’에 대한 애착
체호프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인공·주변인의 범주로 구별되지 않는다. 특정한 ‘세계’에 ‘문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을 도모하는 서사전략이 훌륭한 작가의 기질이라면 그는 분명 이 점에 있어 해당사항이 없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체호프 희곡의 특징이 있다. 체호프는 그의 ‘희곡이라는 장(場)’에 현실적인 인물들을 무한 방종한다. 현실적인 인물들은 몇 가지 특징으로 극화되어 이전과는 다른 ‘전형’을 생성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언어와 신호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발견하거나 타인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체호프가 끌어올리는 것은 바로 ‘몰락’에 대한 질문이다. 몰락한 자들, 몰락한 이후의 것들, 몰락 이전에 공포에 질린 자들의 표정에 대한 물음들…. 체호프는 확실히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된 작가였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참혹함과 아름다움의 구분 짓기를 포기하며 이야기를 그려낸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자들의 이야기, 몰락의 공간 혹은 배경 앞에 방치된 인물들.
<벚꽃동산>은 낭비벽으로 인해 경매에 붙여진 ‘벚꽃동산’에, 그래도 낭비벽을 버리지 못하는 지주 라네프스카야 부인 일가의 인물들이 놓여 있다. <세 자매>에서는 포병부대가 주둔하는 도시에서 부대의 장군이었던 아버지가 죽어 떠난 공간에 남겨진 세 자매의 삼각형과, 그 주위에 군인들의 군상이 배치되어 있다. <갈매기>는 무대에서의 삶과 개인의 사랑 모두에서 성공을 꿈꾸는 배우 니나를 새로운 형식의 연극을 꿈꾸는 작가 뜨레플레프의 무대 속에 배치해 사랑과 갈등,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좌절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바냐 아저씨> 또한 죽은 누이동생의 매부와 그의 새 애인의 좌표 위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면서 삶의 다양함과 그 안에서의 평범함, 그리고 평범함에서 발견한 통찰들을 바냐 아저씨와 가족을 통해 보여준다.
이렇게 체호프는 확실히 인물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틈에서 출몰하는 몰락과 좌절을 겨냥하고, 그런 인물들의 행위가 감행되고 철회되는 틈에서 발생하는 삶의 진실들을 조준한다. 인물들이 모여서 서로 상처받고, 상처를 준 사건현장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현장검증을 하며 인물 하나하나를 해부한다.

다시 체호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체호프가 차려놓은 밥은 분명 맛이 없다. 목이 멜지도, 아마도 돌이 씹힐지도 모른다. ‘몰락의 반찬’이 곁들여진 밥상을 대하는 자들에게 포만감은 있어도 미감의 기쁨은 얻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인들은 끊임없이 그 밥을 먹는다. 왜 그런가? 미루어 짐작하건대 체호프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과 관계에서 비롯된 수많은 양태들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지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분명 체호프는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를 ‘살아낸’사실주의 문학가였다. 체호프 희곡의 인물을 분하는 오늘의 배우는 분명 당대 제정 러시아의 현실을 연극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객석의 관객들은 여전히 자신의 삶과 극 안의 인물의 삶을 대조하게 된다. 생기 없는 현실속에서 가족에게 상처받고 사랑에 좌절하고 끝없는 노동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예술로 노동을 하다
어쩌면 그는 더욱 더 세밀한 현실을 수집하기 위해 삶의 밑바닥으로 자맥질한 작가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세밀한 삶의 결을 헤아리면서 더 많은 대중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예술은 현실을 배제하며 환상을 인도한다?’ 이렇게 예술을 바라보는 공식은 체호프의 희곡과 그의 삶 앞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의 희곡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이라는 환상의 공간과 시간은 현실의 공간과 부대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관계 속에 모든 답이 있다. 비루한 현실이 있기에 그것을 잊기 위한 상상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상 뒤에 ‘힘’, 즉 힘 력(力)자를 어떻게 붙이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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