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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가 모자를 두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이제 모자는 단지 모자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어린왕자의 공이다. 동시에 어린왕자가 만든 또 하나의 고정관념이다. 이제는 모자를 두고 코끼리니 보아구렁이니 하는 단어를 들먹이면 그 자체가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이미 어린왕자가 전매특허를 낸, 그만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어린왕자의 모자 발언은 작가의 세심한 관찰에서 시작된 것이다. 누군가의 머리 위에 놓인 모자였을 수도 있고, 모자걸이에 걸린 모자였을 수도 있으며, 탁자나 소파 위에 올려진 모자였을 수도 있다. 비 오는 거리에 굴러다니던 모자였을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혀 무언가를 받아내는 용도로 쓰이던 모자였을 수도 있다. 단 하나의 모자는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단지 모자 그림이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모자가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로 보이는 순간이 어린왕자 이전에, 작가 생 떽쥐베리에게 있었을 거란 점이다. 빵 봉지와 보름달 모든 상상은 관찰해서 시작한다. 사소하고 비루한 대상일수록 이야기가 자랄 틈이 더 많다. 이질적인 것도 좋고 익숙한 것도 좋다. 구겨진 과자봉지,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 뒤엉켜있는 전기코드, 간판의 크기와 모양, 하수구의 무늬, 현미경 속 풍경 같은 것을 관찰하는 것은 결코 소모적인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빵 봉지 뒷면의 성분표를 읽다가 보름달 모양의 빵 대신 진짜 보름달을 이 봉지 속에 넣으려면 어떤 성분들을 기재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급기야 혼자 달의 성분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과학적 가능성 따위는 일단 제쳐두고 활자가 가는대로 달을 분석해본 것이었다. 자외선 차단제와 몇몇 색소와 15일마다 몸을 조정할 수 있는 보정용 코르셋 같은 것들이 등장했다. 상상은 달처럼 부풀어서 마침내는 그 달을 봉지에 넣어 하늘을 컨베이어벨트 삼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고, 달의 분화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소설이 나의 첫 소설 <무중력증후군>이었다. 빵은 몸이, 봉지는 땅이 모두 흡수해버렸지만 이야기는 남았다. 사람들이 이야기의 출처에 대해 궁금해 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달이 여러 개로 늘어나는 상상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더듬어보니 시작점은 사소했다. 빵 봉지였다.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 상상 상상이란 그 자체로도 즐거운 일이지만, 분명히 현실에서 적절히 활자들을 만나 양감ㆍ질감을 부여받을 때 더 매혹적이 된다. 은밀하고 개인적이던 생각에 눈과 귀를 기울이는 관객들이 모여드는 순간 상상은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다. 상상 그 자체보다 상상을 재생하는 과정이 훨씬 즐겁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쓴다. 상상의 단편들을 깁는 과정에서 활자는 좋은 재료가 된다. 기역ㆍ니은ㆍ디귿, 하는 자음들과 ㅏㆍㅑㆍㅓㆍㅕ, 하는 모음들은 그 사이를 아교로 붙인 것처럼 끈끈하게 결합되어 튼튼한 집을 만든다. 상상력이 선천적인 것에 가까운지 후천적인 것에 가까운지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상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통 후천적으로도 상상력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상상의 효용을 알기 전에 상상을 특별히 현실과 분리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점, 그러니까 상상이 숨을 쉬듯이 몸에 배어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상상력도 힘의 한 영역이어서 쓰지 않으면 쇠퇴하고 가꾸지 않으면 퇴보한다. 관성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상상력이지만, 상상력을 유지하거나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관성의 법칙에 의존해야 한다. 적어도 뇌를 가두지 않는 습관, 그 습관이 관성에 힘입어 체질화되어야 하니까. 상상은 소모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반복하고 투자해도 당신을 지치게 하지 않는다. 현실은 대화, 상상은 혼잣말 상상하기 위해서, 당신의 상상에 대해 기록하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게 자극이다. 상상력이 고갈되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기억력이 둔해지는 것을 걱정하라. 상상의 공백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기억이 공백인 이유는 상상의 공백으로 인해 놓치는 것보다 기억의 공백으로 인해 놓치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지만 기억의 공백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상상의 공백을 경험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동선을 기록해두지 않기 때문에, 저장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남아있는 상상의 산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현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라면 상상은 혼잣말이다. 독백이다. 독자도 고객도 없이 나 혼자 하는 말, 그게 바로 상상이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들은 상상을 한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상의 영역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상상하는 순간, 그 순간을 상상해보라. 외롭고 외로운 그 순간, 세상은 당신의 발아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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