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서 편하게, 새로워서 재미있게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것은 복고나 향수 마케팅이다. 옛것을 가져다 무대에서 새 생명을 부가함으로써 익숙하면서도 다시 새로운 재미를 부여시키는 방식이다.
연말에 공연되는 뮤지컬은 몇 편쯤 될까.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서울의 경우 자그마치 30여 편에 육박하는 작품들이 막을 올린다. 평론가라는 직업 때문에 새로 시작되는 뮤지컬은 거의 빼놓지 않고 보러 다니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관극의 불포화 상태에서 허우적대기 일쑤다. 게다가 요즘처럼 주인공이 두세 명씩 있어 남녀 주인공의 조합을 모두 보려면 말 그대도 매일 밤을 공연장에서 지내야할 판이다. 힘들고 지치지만 반쯤은 사명감에, 또 반쯤은 공연을 좋아하는 애호가로서의 즐거움에 바쁜 시간을 쪼개며 살게 된다.
물론 정반대의 인생들도 많다. 30여 편 중 단 한 편도 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는 옛말처럼, 아무리 좋은 작품이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더라도 꿋꿋하게(?) 문화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2010년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프고 정신없는 일인지는 직장생활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유를 갖고 한 걸음만 물러서서 주변을 돌아본다면 생각은 바뀔 수도 있다. 양보다 질을 생각하는 요즘 세상이고 보니 연말에 공연 하나 제대로 감상해보지 못하는 삶은 안쓰러움의 대상마저 될 수도 있다.
<라디오 스타> <빌리 엘리어트 - 더 뮤지컬>
뮤지컬에 부는 복고ㆍ향수 마케팅
기본적으로 뮤지컬은 '창작'과 '수입'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창작은 말 그대로 우리 예술가와 우리 자본으로 만들어진 국산 콘텐츠를 말한다. 수입 뮤지컬은 다시 일정한 저작료를 지불하고 우리말로 재구성한 '라이선스 뮤지컬'과 출연자와 스태프 등 모든 제작진이 일시적으로 내한해 꾸미는 '투어 뮤지컬'로 나뉜다. 영화와 달리 자막과 무대를 동시에 보는 것이 쉽지 않은 탓에 수입 뮤지컬은 라이선스 뮤지컬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김치에 쌀밥이 속에 편한지, 스파게티나 피자가 입에 맞는지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또 다른 구분으로는 작품의 장르와 형식에 따른 분류인데, 특히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것은 복고나 향수 마케팅이다. 옛것을 가져다 무대에서 새 생명을 부가함으로써 익숙하면서도 다시 새로운 재미를 부여시키는 방식이다. 소재는 여럿이다. 예전의 영화를 가져다 만드는 '무비컬', 왕년의 히트 대중음악을 재활용하는 '주크박스 뮤지컬', 유명 소설을 무대화하는 '노블컬' 등이 그런 사례다.
대표적인 무비컬로는 <빌리 엘리어트`-`더 뮤지컬>이 있다. 영국의 대처 정권시절 한 탄광촌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이 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유명한 발레리노가 된다는 성장 스토리를 담고 있다. 영화가 처음 등장했던 2000년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형 스크린이 흥미롭더라도 무용을 즐기는 데 무대 위의 라이브 퍼포먼스만큼 역동성을 느낄만한 형식도 드물게 마련이다. 결국 뮤지컬로 재구성된 콘텐츠는 전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하게 됐고, 우리말 공연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시스터 액트>나 <스파이더맨> <인어공주>, 그리고 우리 뮤지컬 <라디오 스타>도 비슷한 사례들이다.
<맘마미아>
무대에서 새롭게 태어난 활자
주크박스 뮤지컬로는 역시 <맘마미아!>가 제일 유명하다. 아바의 히트곡들로 꾸며진 이 뮤지컬은 10여 년 세월동안 영국과 미국에서 흥행 수위를 다투는 인기 콘텐츠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만큼 오래 공연됐으니 이젠 표를 구하기도 쉽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착각은 금물이다. 지금도 좋은 위치의 입장권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요즘 런던이나 뉴욕 극장가에서는 주크박스 뮤지컬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퀸의 음악으로 만든 <위 윌 록 유>, 포 시즌스의 음악으로 만든 <저지 보이스>, 테이크 댓의 노래들로 꾸민 <네버 포겟> 등이 대표적이다.
노블컬의 사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등이 모두 소설이 원작인 뮤지컬들이다.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부류의 작업이 왕성하게 시도되고 있는데, 김훈의 소설을 활용한 <남한산성>이나 괴테의 작품을 극화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이 그렇다. 창작 뮤지컬의 대명사로 통하는 <명성황후>도 원작은 이문열의 소설인 <여우사냥>이었다. 아무래도 인쇄매체 속의 활자가 무대에서 입체감 있게 재구성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큰 묘미다.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생명력이 관건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경우도 있다. 드라마를 가져다 만든 뮤지컬이 그렇다. 한류를 선도했던 우리 드라마들의 콘텐츠 파워를 무대에서 다시 재활용해보겠다는 적극적인 의도의 반영이다. <대장금>이나 <선덕여왕> 등은 이미 제작된 바 있고, 내년 개막을 목표로 <풀하우스>도 제작중이라는 후문이다. 수 십 편으로 이뤄진 드라마를 2시간짜리 뮤지컬로 압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공적으로 재구성만 된다면 이미 검증된 대중성이 무대로 확장되는 시장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단지 국내용으로뿐만 아니라 한류를 경험한 글로벌 마켓이 주요한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남다른 매력의 하나다.
국내 뮤지컬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된 것은 채 10년이 못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뮤지컬은 '배고픈 무대 예술'의 한 분야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환점이 된 것은 우리말로 번안된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역삼동의 한 공연장에서 막을 올린 이 작품은 7개월 동안 140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19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공연도 제대로 만들면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이후 여러 편의 외국 대형 뮤지컬들이 앞 다퉈 소개됐고, 해마다 17~18%에 육박하는 시장의 성장을 기록했다. 아직 규모 면에서는 방송이나 영화ㆍ게임 등 여타 문화산업 장르에 비해 한정적이지만, 성장률로만 보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급속한 팽창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나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중을 설득하기 위한 여러 전략들도 앞 다퉈 개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올해 가장 큰 화두는 '스타 마케팅'이었다. 아이돌 연예인들을 전면에 내세워 관객을 불러 모으는 전략이다. 소녀시대의 제시카와 미스 코리아 이하늬가 나왔던 <금발이 너무해>, 정준하와 김원준이 가세한 <라디오 스타>, 유노윤호가 등장하는 <궁>, 시아준수가 타이틀 롤을 맡았던 <모차르트> 등이 대표적인 흥행 사례들이다. 10대들의 팬덤 문화가 뮤지컬과 결합돼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물론 여기서 소개한 내용들은 현대 뮤지컬의 트렌드를 알려주는 일부 현상들에 불과하다. 공연으로서 뮤지컬이 지니고 있는 매력은 매일 밤 재연되는 무대의 특성처럼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력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특정한 형식이나 장르, 유행 자체에 있다기보다 대중과 호흡하고 소통하며 진화하는 생명력, 그리고 생생함을 전해주는 현장감에 있다.
<대장금>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로, 문화산업 전문가이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뮤지컬 평론가이다.
십 수 편의 뮤지컬을 번역했으며, 저서로는 <원종원 올 댓 뮤지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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