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5-06 : 이제 속도인가 여유인가 - 말과 문자의 사이에 담긴 뜻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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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인/문화평론가

속도와 실용성으로 상징되는 E-Mail, 그러나 현대인은 그 것을 비켜가는 수단으로 E-Mail과 더 친숙하다.

불과 5, 6년 전쯤 얘기. 당시에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삐삐가 대유행이었다.
인구의 절반이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요즘으로서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최첨단 이동통신 수단이었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휴대폰이 봄 들판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터넷, 디지털, 이동통신 등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우리는 종종 과거를 망각하곤 한다. 정확히 10년 전만 해도 컴퓨터를 구경도 못해 본 대학생이 대부분이었고, 삐삐를 갖고 다니는 사람은 정보 계통에 종사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삐삐는 점점 휴대폰으로 전환되어 가며, 삐삐의 유효 기간은 만료되어 가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다시 삐삐의 시대가 오고 있는 듯하다! 물론 옛날의 그 삐삐는 아니다. 문자와 화상정보 등 인터넷 서비스가 오갈 수 있는 쌍방향 메신저 형태의 삐삐이다. 이 변화는 삐삐와 휴대폰에서 시작해서 양자가 통합되는 IMS 형태로 수렴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어찌보면 기술적 변화의 속도에 역행하는 '구식' 서비스처럼 보인다. 특히 휴대폰에서 ‘첨단’ 삐삐로의 변화는 더욱 더 그러하다.

속도를 역류해 여백을 찾는 사람들

원래 휴대폰은 들고 다니면서 걸고 받을 수 있는 전화기라는 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편리와 속도라는 관점에서라면 이해하기 힘든 기능들이 휴대폰에 추가되고 있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 하지만 휴대폰을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한 용도로 쓰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번지고 있는 문자 메시지같은 기능이다. 문자 메시지는 대개 휴대폰에서 휴대폰으로, 또는 인터넷에서 휴대폰으로 전해진다.
E-Mail을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점이 있다. 사람들은 왜 말로 의사를 전달하지 않고 문자로 전송 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 심리는 무엇일까? 아마도 말의 직접성 때문인 것 같다.
통신의 발달은 말의 직접적인 만남을 쉽고 빠르게 만들어 주었다. 전화를 걸면 상대방이 바로 받는다. 하지만 그건 너무 직접적이어서 ‘틈’과 ‘에누리’와 ‘여백’을 없애버린다. 때로는 그 정확함이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는 벤야민(Benjamin)이 말했던 ‘아우라(Aura)’의 상실을 가져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다시 현대의 속도를 역류해서 느리게, 우회적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고 싶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문자 메시지의 확산을 가져온 정서적인 배경일 것이라 짐작된다.

‘E-Mail로 천천히’의 배경

현대 정보화사회가 주는 ‘속도’에 걸맞지 않는 현상은 또 찾아볼 수 있다. 가령 E-Mail만 해도 그렇다. 요즘 같은 초스피드 시대에서 편지라는 것은 그것이 우편을 통한 것이든 전자편지이든 얼마나 느린 속도로 전달되는가! E-Mail이, 보내는 데 있어서는 무척 빠르지만 받는 데 있어서는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요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심지어는 E-Mail을 잘 받았냐고 전화로 확인하는 사태까지 생긴다. 사람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붙어살면서 시시각각 편지를 확인하는 것도 아닐진대, 단지 속도가 문제라면 발신 즉시 확인이 가능한 전화를 두고 누가 편지 (설사 그것이 E-Mail이라 할지라도)를 보내겠는가. 따라서 E-Mail의 용도는 ‘속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비즈니스 목적으로 E-Mail을 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E-Mail이다. 친교 차원에서 오가는 것에 국한되겠지만, 속도 우위의 사회에서 E-Mail은 오히려 그 속도를 느리게 만들려는 노력의 소산으로 읽힌다. 대놓고서 전화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E-Mail이나 문자 메시지로는 어느 정도 가능한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E-Mail은 너무 빠른 속도에 틈을 생기게 하려는 행위로 해석된다.

묘한 역설로 들리겠지만, ‘신세대’는 편지 쓰는 일에 낯설지 않다. 그들에게 편지는 생활의 일부이다. 단지 편지를 부치는 방식이 예전과 달라졌을 뿐이다. 신세대는 그 직전 세대보다 더 많은 편지를 쓰고 받는다. 또한 그 이전 세대도 전보다 더 많은 편지를 주고 받게 되어간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모든 사람들이 ‘신세대화’되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문자 메시지나 E-Mail과 같은 현상이 속도와 실용성을 강조하는 현대의 상징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현상이 오히려 속도와 실용성을 비켜가고자 하는 현대인의 몸짓으로 보인다. 기술에 대한 특별한 편견 없이 본다면 말이다.

애써 현대사회의 부정성을 들먹일 필요는 없다. 조여오는 사회 장치가 우리를 얼마나 갑갑하게 만드는가. 직장생활은 숨막히고 학교생활은 더 숨막히고, 속도만이 경쟁에서 승리하게 해주리라고 예언된다. 누군가가 굳이 소리 높여 편리함 뒤에 있는 삭막함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느낌이 이미 촉지(觸知)되고 있다.

사업상의 문제를 얘기할 때는 빠르고 직접적인 것이 편리할지 모른다. 하지만 막상 개인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잠시 떠나고 싶어진다. 곤두선 신경이 이완되길 바라며 감수성이 살아나길 바라고 가볍고 가뿐해지길 바란다. 바로 그 돌파구로서 찾아진 우회로가 문자 메시지 같은 것이 아닐까. E-Mail을 장식하기 위해 사용되는 고운 편지지도 그렇고.

감성, 문제를 느끼고 제기하는 능력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긴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해서 그런 상태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철학자 베르그송(Bergson)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는 모습을 볼 때, 다시 말해 인간이 생명을 상실하고 물질을 닮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 ‘웃음’이 야기된다고 말한다. 이 분석이 맞느냐 그르냐를 떠나, 그가 생명과 물질을 대립시키는 대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물론 베르그송이 말하는 생명/물질의 대립이 정신/육체의 대립으로 단순 대응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기계의 부속처럼 살아가는 우리 삶에 생명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베르그송은 지성과 직관을 구분한다. 계산적이고 도구적인 능력인 지성은 삶의 필요
때문에 진화했으며,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지성은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것을 푸는 역할을 한다. 반면 직관 능력은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우리말의 감성에 해당한다 하겠다. 사실상 우리가 감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감성이 문제를 느끼고 제기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나아가 생명에게 필수 불가결하다.

그렇다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 주어진 문제를 잘 해결하기만 하면 전부가 아니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주어진 문제를 푸는 행위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시험을 보던 습관이 어른이 된 후에도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초등학생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다. 생명의 진화의 역사는 그것의 좋은 증거이다.

발명왕 에디슨이 여느 초등학생과 달랐던 점은 무엇이었던가? 에디슨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할 줄 알았다. 닭이 알을 품으면 병아리가 실제로 나올까? 1 더하기 1은 꼭 2일까? 등등. 적어도 그는 선생이 묻는 문제를 스스로 다시 묻고, 그것을 자기가 물은 물음으로 바꾼 다음에야 그것을 풀려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잘 하지 못하는 일이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이 능력이 요즘 유행하는 ‘벤처’정신의 바탕이다. 벤처가 기업이 되면 돈을 목표로 삼게 되고 또 그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벤처는 기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 바꿔 말해 벤처정신이 없는 벤처기업은 좌절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벤처정신의 바탕은 문제를 느끼고 제기하는 감성이다.

우리는 문자 메시지와 E-Mail이라는 현상에서 현대를 이끌어 가는 속도전의 총화가 아니라 속도를 가로질러 벗어나려는 몸짓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느낌은 어디서 오는가? 이렇게 물어가는 속에서 우리는 생명의 힘을, 감성의 힘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또 실천해 오고 있는 셈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