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대로 놔두어라
이 말처럼 철학적인 깊이를 요구하는 말이 있을까요? 과연 그대로 놔둬도 되는지, 힘든 시간이 과연 지나갈 것인지,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이 필요한 이들에겐 이 말만큼 어려운 말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얘기를 폴 매카트니는 참 쉽게 전합니다.
비틀즈의 'Let it be'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낸 앨범으로 지금까지 전세계인을 위로하고 있는 명곡입니다. 말하듯이 내뱉는 노랫말과 마음을 만지는 멜로디, 그리고 모두를 위로하는 가사들. 사실 노래 한 곡을 다 들어도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이 노래가 폴 매카트니가 지쳐있던 시기에 만들었고, 꿈에서 실제 돌아가신 어머니 메리를 만나고 나서 만든 노래이니만큼, 모두에게 위안을 준다는 거죠. 누군가의 교훈적인 조언이나 다독임보다 더 많은 공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노래는 전세계가 공유하는 가장 쉬운 ‘화법’입니다.
쉽게 말하기 위해선 많은 전제가 필요합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어떻게 전할지 수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 듣는 이를 많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노래만큼 문화적 영향력이 세지 않지만 브랜드의 콘텐츠도 결국 쉽게 전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이야기입니다. 쉬워야 가장 큰 힘을 갖게 되기에, 어떻게 하면 쉽게 공감을 얻고 호응을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이디어라고 부르죠.
하인즈의 브랜드 파워, 쉽게 말하기
하인즈는 늘 얘기합니다. 케첩하면 하인즈라고. 영화에서든 일상에서든 사람들은 케첩하면 하인즈 케첩의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고. 토마토 케첩을 대표하는 하인즈의 브랜드 가치를 늘 강조합니다. 이번에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변함없지만 AI라는 새로운 툴을 가져왔습니다.
Craiyon은 인공지능 플랫폼입니다. 특이점은 어떤 문장을 입력해도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낸다는 겁니다. 물론 Craiyon이 해석한 대로 때로는 괴기스러운 그림이, 때론 생각보다 더 아트적인 그림이 나오기도 합니다. Craiyon은 유일하게 대중에게 개방된 AI플랫폼입니다. 누구나 구절을 입력하면 그에 해당하는 그림을 얻을 수 있죠. Craiyon측에 따르면 요즘 하루 5백만 구절이 입력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AI가 그려내는 ‘괴상한’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려진 그림은 캡춰 버튼을 눌러 SNS에 올릴 수 있습니다.
하인즈는 이 AI의 힘을 빌려 작품을 선보이기로 했습니다. 단지 ‘케첩’이라고 입력했을 뿐인데, Craiyon은 하인즈 케첩을 그려냈으니까요. 하인즈는 이어서 여러개의 구절을 입력합니다. AI는 연이어 하인즈 케첩을 활용한 작품들을 쏟아냅니다. 하인즈는 이게 그들의 힘이라고 합니다. AI도 케첩하면 하인즈인 걸 알고 있다는 거죠. 그들은 다양한 문구를 입력해 다양한 작품을 얻었습니다. ‘케첩 르네상스’, ‘케첩 인상주의’, ‘케첩 길거리 아트’, ‘케첩 스테인드 글라스’, ‘케첩 타로카드’, ‘토마토 케첩’, ‘케첩 신스웨이브’, ‘케첩 우주’, ‘케첩 아메리카나...’ 어떤 단어를 입력해도, 그림은 달라도, 케첩병은 하인즈입니다. 하인즈는 AI도 인정한 그들의 브랜드 파워를 모아 광고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다양한 아티스트를 섭외해 만든 작품처럼, AI가 다양하게 그려낸 하인즈. 팝아트처럼 멋있는 하인즈 시리즈가 탄생했습니다. 하인즈는 이번에도 그들의 브랜드 파워를 쉽게 전달했습니다.
혹시 AI가 그려내는 그림이 궁금하다면 craiyon.com에 가서 원하는 문구를 입력해 보세요
헌혈을 쉽게 소구하기
여름은 호러 무비가 많이 등장하는 시즌입니다. 한국이든 외국이든 비슷합니다. 호러 무비에는 꼭 피 흘리는 장면이 등장하죠. 반면 적십자에겐 여름은 헌혈 비율이 낮아지는 계절입니다. 헌혈의 25%를 차지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이죠. 올 여름은 특히 헌혈량이 더욱 부족하다고 합니다. 적십자는 타깃을 설득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생각해 냈죠.
영상엔 ‘스크림’의 주인공인 네브 캠벨이 등장합니다. 여지 없이 누군가 피를 흘릴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하죠. 긴박한 장면에 도망가던 네브 캠벨은 갑자기 ‘내가 왜 도망가죠?’라며 오히려 침입자에 맞서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호러 무비에서 늘 보던 장면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버려진 정신병원 옆으로 캠핑을 간 치어리더, 13일의 금요일에 침입자를 직면한 남자, 폭풍우 치는 집에서 아기를 보고 있는 베이비시터, 하지만 창문엔 여지없이 감옥에서 탈옥한 살인자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긴박한 순간, 그들은 모두가 피를 흘릴, 피를 낭비할 장면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네브 캠벨은 진짜 무서운 건, 미국인의 50%가 피 흘리는 호러 무비를 즐기지만, 단 3%만이 헌혈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죠. 미국 적십자는 피는 영화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니, 지금 헌혈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합니다.
호러 무비의 클리세들을 모아 만든 헌혈 메시지.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를 위트 있게 잡아냈습니다. 영상의 영화적인 완성도는 다수의 영화를 찍은 맷 스파이서 감독과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의 촬영 감독, 칼렙 헤이만의 공입니다.
미국 적십자가 BBDO-NewYork과 손잡고 만든 이 콘텐츠는 타깃의 취향에 맞게 제작돼, 다양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지루하지 않은 방법으로 헌혈을 얘기하면서.
워라밸에 쉽게 공감하게 만들기
지난 6월, 하이네켄은 특별한 병 오프너를 선보였습니다. 이름하여, ‘더 클로저(The Closer).' 이 오프너로 맥주병을 따면 가까이 있는 노트북이 ‘잠자기’상태로 바뀌는 효과가 있습니다. 광고에는 모든 전깃불이 꺼지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노트북의 상태를 바꿔주는 역할만 가능합니다. 기업을 상대로 네트워크를 공급하는 NordVPN Teams에 따르면, 팬데믹을 거치며 뉴욕 직장인들의 업무 시간은 하루 평균, 2.5시간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테크가 발달하고 어디서든 업무가 가능해지면서 오히려 업무 시간이 늘어난 거죠. 하이네켄은 무너져가는 워라밸을 다시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오프너를 개발했죠.
그리고 7월에는 소비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뉴욕은 서울만큼 잠들지 않는 도시입니다. 하이네켄이 찾은 이유는,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 야근족들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여전히 빌딩들 곳곳엔 불이 켜져 있습니다. 하이네켄은 그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프로젝션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나타났죠. “늦게까지 야근하세요? 하이네켄 클로저가 도울 수 있습니다.” 야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들의 스마트폰에 그들의 메시지가 찍혔고, 하에네켄도 이 이미지를 촬영하여 스틸 콘텐츠로 활용했습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생중계 아웃도어 광고를 만든 셈입니다.
워라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실제로 테크를 접목한 오프너를 개발하고, 실제 야근하는 곳을 활용해 광고로 만든 하이네켄. 워라밸을 이보다 더 쉽게 전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상 속 휴식을 주는 하이네켄. 이번 캠페인으로 그들의 이미지는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가장 어려운 방법
사실 쉽게 말한다는 건 가장 어려운 방법입니다. 쉽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타깃이 쉽게 공감하게 하려면 그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메시지와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7월 25일은 ‘세계 익사 방지의 날(World Drowning Prevention Day)'입니다. 이에 ‘아동 안전 추진 협회(Assocation for the Promotion of Child Safety)는 익사의 위험을 알릴 쉬운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물속에 빠지면 아무리 온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도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은 어떤 소리도 가둬버리기 때문이죠. 이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협회는 락커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연주하게 했죠. 놀랍게도 물 위는 매우 평온합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락커들이 물속에서 아무리 광란의 연주를 펼쳐도 물 주변은 잠잠하기만 합니다. 이렇게 누군가 빠져서 도움을 청해도 들리지 않으니, 조심할 것을 경고하죠.
어떤 계몽적인 소구보다 효과적입니다. 락밴드를 통해 익사의 위험성을 쉽게 전달합니다.
이렇게 쉬운 방법을 찾기 위해, 크리에이터들은 수많은 아이디어를 펼치고 접고 다시 발전시키고, 끊임없는 고민을 했겠죠. ‘쉽게 말하는 콘텐츠’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수많은 고민과 협의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쉬운 메시지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신숙자 CD의 해외 크리에이티브 20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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