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1-12 : 광고와 문화 - 썰렁한 언어유희 - 차려진 밥상 위의 맹물 그릇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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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I 시인, 상지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앗싸, 뚜리리히히~

몹시 놀랐다. 매우 충격적이었다. 우째 이런 일이!
스스로 ‘교양지’를 표방하는 잡지였다. 철학자, 소설가, 시인, 목사, 오지 여행가, 문화평론가 등등의 필자들이 차례로 깊고 깊은 연륜과 통찰력을 겸비한 탁월한 필력으로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전하는 그 교양지의 한복판 인터뷰 코너에 ‘이박사’께서 등장하신 것이다. 철학박사도 아니고 문학박사도 아니고 이학박사도 아닌, ‘신바람 이박사’께서!

잠시 그 인터뷰 기사의 첫머리를 옮겨보자.
“가수 이박사. 요즘 그를 모르면 신세대들 사이에서 ‘짤없이’ 왕따다. 본명이 이용석인 그는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하면서 노래 실력을 발휘, 1989년 ‘신바람 이박사 1집’을 낸 뒤 지금까지 19개의 테이프를 발표했다. 그럼에도 그가 부르는 ‘뽕짝’은 이른바 ‘B급’으로 취급돼, 정작 그는 일본에서 더 잘 알려진 가수다. 지난 7월엔 일본에서 히트한 곡들을 모은 ‘李博士-스페이스 팬터지(Space Fantasy)’를 냈고, 9월 말 뮤직비디오 촬영에 이어 11월 중순 1.5집 발매, 11월 말 첫 콘서트 등이 준비돼 있다(<작은 이야기>, 2000년 11월호).”

짤없이 왕따 당할까 무서워 미리 고백하련다.
나도 이박사를 그전부터 알고 있었다. 작년의 일인가. 칠순 노모께서 어느 날 내게 이박사 테이프를 사다 달라고 부탁하셨다. 동네 계모임에서 버스 타고 관광 가던 길에 이박사를 듣고 감동 받으셨던 것이다. 나는야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 세운상가 도매상에 가서 ‘정품’으로 두 개나 사다 드렸다.
들어 봤냐고? 어머니 옆에서 잠시 들었다. 어떻드냐고? 웃겼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상전벽해, 뽕나무 밭이 바다 된다더니, 1년 사이에 이박사를 모르면 신세대들한테 짤없이 왕따를 당한다는 것이다. 칠순 노모한테 당하는 게 아니고? 경천동지, 하늘도 놀라고 땅도 뒤집어질 얘기 아닌가!

2000년도 벌써 열한 달이 지났다.
불행히(?) 그 열한 달 중에 내가 이 땅에서 보낸 시간은 여섯 달뿐이다.
그러니 2000년을 뭉뚱그려 뭐라고 떠드는 얘기를 내가 하면 그건 사기다. 그러니 그냥 사기 당하는 셈치고 내 말을 들어 주기 바란다. 거기다 덧붙여 내겐 문화평론가라는 해괴한 직업에서 비롯된 일종의 직업병도 하나 있다. 별것도 아닌 문화적 현상을 거창하게 해석하려는 나쁜 버릇이다. 그것도 감안하면서 내 말을 들어 주시라.

내 생각에 2000년 최고의 문화적 사건은 ‘이박사’다.
‘B급 문화의 화려한 정상탈환’ 이라고 말하면 물론 과장이고,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더니’ 라고 말하면 B급 문화에 모욕이고, 도대체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B급 문화의 부상? B급 문화의 대반격? 자, 박사 논문 쓰는 것도 아닌데 대충 그 정도로 표현하고 넘어가자.


우리는 이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B급 문화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왜 이렇게 글을 유치하게 쓰고 있냐고 물으신다면? B급 문화를 얘기하는 자리이니만큼 글도 B급으로 쓰겠다는 절치부심의 발로라고 말하겠다. B급 문화는 눈물의 씨앗이다. ‘아직도 이런 사랑이 우리 곁에 남아 있었다’ 운운하는 카피의 광고를 업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가는 소설들을 읽으며 흘리는 눈물, 그리고 ‘와 이리 재밌노!’하며 데굴데굴 구르다 허리를 다쳐 흘리는 눈물의 씨앗이다. 그 격렬한 희비쌍곡선 위로 롤러블레이드 또는 킥보드를 타고 달리는 문화가 B급 문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빙빙 돌리지 않고, 세련된 테크닉 따위 생각도 말고, 최루탄이든 폭소탄이든 그냥 감정에 직격탄으로 한 방 먹이는 문화, 그것이 B급 문화다.

가엾은 B! C부터 X, Y, Z까지 25개나 되는 하자(下字)들이 있는데 왜 덜 떨어지고 촌스럽고 심지어 불법인 모든 것에 ‘B급’이라는 말이 붙게 되었을까? B급 영화, B급 노래, B급 비디오, B급 책, B급 문화...... B로서야 억장이 무너지고 울화통이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지만, 하여간 B는 A가 아닌 모든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최상급을 제외한 모든 등급의 사물을 가리킨다. 임금님이 A라면 그 아래 만백성은 다 B로 싸잡아진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계급사회성 생물이고, 그 생물학적 바탕 때문에 언어를 포함한 모든 문화 역시 수직 위계질서(hierarchy, 이 단어에는 higher, 즉 ‘더 높은’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를 벗어나지 못한다. A석으로도 모자라 S석, 심지어 R(로열? 음, 여왕벌 생각이 나는군)석을 만들어내는 인간들이다. A급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 결국은 이 계급사회가 시키는 일이다. A급 권력자와 부자와 먹물들이 나머지 따라지 B급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왕따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세상은 대충 그렇게 굴러왔다. 맨날 A급에 대해서만 떠드는 게 지겹다보니 어쩌다 재미난 B급을 만나면 B급 문화가 어쩌네 저쩌네 가끔 떠들어 주는 먹물들 덕분에 몇몇 B급 문화들이 빛을 보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얼어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았고, 기생집에 놀러가서도 시와 책과 그림을 이야기해야 했던 선비의 나라 한국에서 B급의 상황은 물론 몹시 나빴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대통령께서 예술의 전당 로열석에서 꾸벅꾸벅 졸며 유럽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을 듣는 것에 대해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1년에 한 번 단풍놀이 관광버스에서 눈물겹게 놀아보는 달동네 아줌마들의 신바람 메들리만 언제나 죽자게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신바람 이박사께서 중앙 정론지의 인터뷰란을 장식한다. 어쩌다 이런 일이? 왜 이런 일이? 왜 롯데리아의 새우버거 광고에서 양미라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저고리 몸빼 차림으로 등장하는지, 왜 이동통신 Na 광고에서 ‘츄리닝’ 바지 아저씨가 “나도 공짜가 좋아”하며 난리 블루스를 춰 대는지, 어쩌다 신바람 이박사가 신세대들의 우상이 되었는지, 왜 서점마다 온통 황당한 ‘팬터지’ 소설들로 서가가 미어터지는지, 우리는 이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럭무럭 자라라, B급들아.

세상이 넓으면 할 일이 많듯, 지면이 넓으면 할 말도 많을 것을, 내게 주어진 지면은 한반도보다 좁다. 서두르자.
B급 문화는 인류 역사 내내 존재해 왔다. 예(禮)에 맞지 않는 악(樂)은 나라를 망친다고 공자님이 그토록 떠들었건만,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유교 국가 한국에서도 이박사는 19개의 테이프를 만들어 천만 장 단위로 팔았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새롭게 B급 문화들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공기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B급 문화에 대해 사람들이 공식 채널을 통해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바쁘지만, 여기서 잠깐 샛길로 빠질 필요가 있다.
신바람 이박사께서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지 않았어도 우리는 지금 이박사를 이야기하고 있을까? 푸코와 데리다를 수입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이박사까지 일본에서 역수입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하지 않은가? 자, 다시 원래 가던 길로 돌아가자.

사회가 민주화될수록 문화도 민주화된다. 민주화가 잘 진행되고 있는 사회에선 B급 문화가 반지하 월세방에 머물지 않는다. 가끔 아파트 단지 마당에도 올라올 수 있게 된다. B급 중에도 최하급 문화였던 펑크와 랩, 빈민 실업자 청소년들의 문화였던 그 펑크와 랩이 서구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되었는지를 기억하면 된다. 물론 펑크와 랩이 제도권으로 진입하고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하드코어를 낳았다고 해서, 그 사회가 계급사회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는 아니다. 영국과 미국은 전세계 최악의 계급사회 국가들이니까. 내가 말하는 민주화된 사회는 ‘권력의 분배’가 조금이나마 이루어지는 사회를 뜻할 뿐이다.

신바람 이박사가 신세대의 우상이 되었다는 대목은, 이 땅의 청소년들이 더 이상 주눅들어 있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상관없다. 음악대학에서 푸치니와 베토벤만 배우고, 중고등학교에 와서 모든 대중음악은 쓰레기라고 가르쳤던 음악 선생들의 ‘권위’에 대해 코웃음칠 ‘권력’을 아이들이 갖게 되었다는 얘기다. 제도권 언론의 기자들이 내 칠순 노모의 취향을 지들 멋대로 천박하다고 얕잡아볼 수는 없게 되었다는 얘기다. 10대 아이들과 칠순 노모의 권력은 조금 늘어났고, 언론고시 패스한 기자들의 권력은 조금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당신이 “B급 문화의 80∼90%는 쓰레기다”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라고 맞장구쳐 줄 수 있다. 그러나 덧붙일 말이 있다. A급 문화의 80∼90% 역시 쓰레기라고. 다시 말하지만, A는 하나고 B는 스물 다섯이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한심한 B급이 더 눈에 잘 띌 뿐이다. 게다가 더 중요한 건 세상이 온통 쓰레기 매립장이라는 사실이다. 빌 게이츠 한 사람이 가진 돈으로 전세계의 굶어죽는 어린이를 살릴 수 있는 세상이 쓰레기 매립장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말이다.

무럭무럭 자라라, B급들아. 너희들 그 잡초같은 생명력으로 열심히 자라서 이 쓰레기매립장 세상을 조금만 더 푸르게 만들어 다오. 참을 수 없이 무겁고 무거운 이 쓰레기 세상의 무게를 코딱지만큼이라도 줄여다오. 앗싸, 뚜리리히히히!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