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융합과 마주하다
- 서울미술관의‘ 노벨로 피노티’전
정 현 진
브랜드액티베이션2팀 대리 / cristalzzang@hsad.co.kr
불금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토요일 아침의 평화로움을 느끼고자 한다면, 서울 방방곡곡 숨어있는 미술관을 탐방하는 것도 방법 중의 하나일 테다.
나만의 허세스러움을 표출하고자 주로 찾는 부암동의 카페거리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있다. 서울미술관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의 미술관인데, 그곳은 언제나 중국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움이 가득 차 있어 내겐 항상 불만의 거리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별서로 사용된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던한 스타일의 미술관을 2012년 개장했다. 정자에서 서울의 거리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경관과, 19세기 후반 양반의 고요하지만 수려한 건축미를 느낄 수 있는 석파정이라는 이름의 별서는 옛 조상들의 풍류와 예술적 정취를 공감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부암동에서 만난 현대 조각 장인의 예술혼
자주 들리는 부암동 거리이건만, 소란스러움이 싫어서 번번이 스쳐지나가기만 한, 평범하지만 이질적인 이곳을 토요일 오전 방문하기로 했다. 미술관을 혼자 가는 것은 생각보다 큰 번잡스러움과 용기가 필요하다. 추레해 보이지 않게 머리에 힘이라도 주고 번듯한 시계라도 하나 차고, 마치 내가 이 전시관의 특급 게스트인 척 행동하지 않으면 괜히 나도 모르게 압도적인 예술품에 주눅 들어 제대로 된 감상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2015년 서울미술관의 첫 기획전시로 이탈리아 현대 조각계를 대표하는 작가인 노벨로 피노티(Novello Finotti)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언제나 상냥한 안내요원의 도움으로 표를 받아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검게 그을린 조명과 바로크풍의 기괴한 음악이 조화를 이루며 시간과 공간의 소용돌이로 나를 인도한다. 거대한 전시관에서 예술혼이 깃든 작품과 내가 홀로 대면하게 되는 순간 숭고한 예술혼이 나를 압도하는데, 이것이 내겐 소름으로 돋아나는 듯 하다. 아무도 없기 때문에 비롯된 일시적 환상이라고 해도, 대리석·청동 등의 재료를 이용해 추상과 구상의 양면성을 지닌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때로는 괴이한 예술작품을 하나하나 마주하고 있으면 이곳이 진정 흥선대원군의 별서인지 시스티나 성당인지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조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설명을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데, 작품과 설명을 번갈아 보아야 하기에 번잡스러움이 존재해 몇 관을 천천히 살펴보다 보면, 어느 순간 설명 대신 나만의 느낌을 조각에 투영하게 된다. 글쎄… 결국 내가 생각하는 조각이란‘ 주어진 신성한 재료를 통해 조각가의 헌신과 혼신이 담긴 형태의 아름다움을 구현, 보는 이로 하여금 신성을 발현시켜 경외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다양한 신의 모사를 비롯해 중세 시대 발현된 예수와 친구들의 조각상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의 다양한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사실을 더 이상 사실로 재현할 필요가 없는 현대사회에서 조각은‘ 형태미’를 강조하기보다‘ 형태의’를 강조하는 것이 주된 의미인 듯하다. 따라서 재료를 통한 형태미를 강조하기보다 생각을 통한 작가의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데에 전시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실 감상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즐거움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뇌의 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때로는 감상 자체가 내겐 버겁기도 하고 피로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추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공간의 늪에 빠져 다양한 의미를 생각하기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인간의 몸에서 만나는 시대정신
노벨로 피노티의 작품은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형태와 시대를 반영하는 의식의 불편한 융합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아름다운 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형태를 지니고 있는 그 몸이 르네상스 시대의 그것처럼 마냥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1960년대 파편화된 시대상을 반영해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반문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의 시대, 그리고 자본주의의 완벽한 승리,자본주의의 완벽한 승리 뒤에 찾아온 오만한 돈의 횡포, 인간 사회는 어느새 대의가 사라지고 파편화된 사회의 메시지만 받아들이며, 자본주의의 허망함을 즐겨야만 하는, 이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결국 파편화된 아름다움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갈망하는 아름다운 여성의 나체가 아름다운 가슴만으로 나열되어있다면 이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괴기스러운 덩어리 중 하나 밖에 될 수 없다는 것, 아름다운 몸과 몸에 좋은 아스파라거스의 융합 자체만으로 그것을 보는 데에 불편함을 준다. 의미 있는 두 가지 오브제의 융합이 불편한 진실이 되어 버리는 현실을 비꼬는 것은 아닐까?
시간과 공간이 엮여 있는 우리의 세계 또한 사실과 사실이 맞부딪쳐 불편한 진실을 마구 양산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고즈넉한 서울미술관과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움이 불편함을 양산하듯이,
아름다운 조화 대신 부적절한 융합이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과 사실이 융합해 더 나은 진실을 마주하게 하려면 어떤 삶의 조각을 빚어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평화로운 토요일 오전, 1960년대 이탈리아 조각 장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일상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대신 세상의 진정한 융합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계기를 만났다. 나의 생각이 거대한 세계에 무슨 영향이라도 끼치겠냐마는, 티끌 같은 나의 반문이 세상의 모순을 바로잡는 데에 조금이나마 일조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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