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7-08 : 매니아, 그들은 누구인가? - 세계와 대화해야 할 창조자 혹은 정복자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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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길섶 / 문화비평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아 정체성은 매우 불안하다. 어떻게 보면, 누가 표현했듯이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의 시간이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해방적이기보다는 더 감금적이고 더 공포적이게 되고 있다. 그러나 더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 공포적 환경을 우리는 스펙터클화하거나 카니발화하며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공포류의 만화나 영화, 소설이 인기가 높은 것도 바로 그 까닭일까?

오늘날 다양한 문화적 거점들에서 두터운 매니아층을 형성해가고 있는 것은 자아 정체성의 불안한 징조들을 까부수고 즐기는 탈출구적 코드화가 아닐까한다.

새디즘적 자아 정체성

우리는 새디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성적 가학성을 통해 쾌감을 즐기는 변태행위’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성윤리적으로 경멸하는 버릇을 가져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훈육을 받아왔다.

최근의 매니아들은 이런 새디즘적 부류를 형성하기도 한다. 90년대부터 사이버 세계가 펼쳐지고 컴퓨터통신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새로운 현상이 도래하자 통신 매니아들도 출현하였다. 이른바 통신 논객’들은 네티즌계의 대표적 매니아이기도 했다. 그러나 굳이 통신 논객이라고 하지 않을지라도, 게시판을 휘젓고 다니며 끊임없이 글을 올리는 매니아들 중 새디즘적 성향을 보여주는 네티즌들이 많다. 폭언과 욕설과 비난이 없이는 글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타자들을 가학함으로써 자신의 쾌감지수를 높인다. 최근에는 그런 홈페이지들도 생기고 있다.

새디즘은 매니아들의 일반적 정체성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어쩌면 그 성향체계의 하나일 수 있다. 특히 사이버 세계가 등장하면서 도드라졌다. 가학에의 매니아적 집중, 무차별 대중을 향한 발언이든 특정 개인을 겨냥한 발언이든 그것들은 단지 비난에 찬 경멸의 표현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쾌감을 투여하는 자아정체성의 한 방식인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매니아란 항상 매니아적으로 살아가는 자아 정체성만으로 일관되는 게 아니라, 일시적 시간들의 동어반복을 통해 특정한 방식으로 집중하는 새디즘적 투여이기도 하다. 물론 매니아가 곧 새디스트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새디즘적 성향으로 읽어내는 것은 매니아는 이미 자기학대’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채팅하는 족속들을 보라. 채팅의 쾌감을 위해서는 자신의 신체를 컴퓨터 기계화로 가학해야 한다.

자아 정체성의 위기가 커질수록, 공포화된 사회일수록, 새디즘적 매니아는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적인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사회적 정체성의 또다른 변수가 되고 있음을 문제화할 필요가 있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가속화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재 자체가 물신화되고 있는데, 그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자아의 욕망과, 그 메커니즘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족쇄의 충돌로 인해 생성되는 정신분열적 자아들이 새디즘적 매니아로 주체화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사회는 자아 정체성을 결코 상호신뢰할 만한 인간형으로 만들 수가 없고, 타자들을 기만하고 착취하고 학대해야, 그리고 자신마저도 가학해야 생존하게 되는 '20 대 80의사회’라는 정글의 법칙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사회는 새디즘적 터널로 들어가고 있다. 최근의 벤처사업가들은 바로 그 대표적 표상이다. 그들은 직업적 매니아이며, 최고라는 기적’을 창조하기 위해 스스로를 프로그램화하는 노동기계로 가학함으로써 살아있다는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는 타자들을 가학해야 한다는 논리가 필연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새디즘적 매니아는 새디즘화되는 사회에서의 매니아적 일상성을 생산하는 자아정체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디즘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성도착증자의 가학적 변태행위라는, 단지 그것뿐이라는 오해. 그리고 무지 나쁜 짓이라는 단 하나의 시각. 그러나 새디즘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사드(M. de Sade)가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싫어했고 진정한 공화정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 두 가지는 법’과 계약’이다. 그러나 사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을 성적인 변태로 은유화한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들뢰즈(G. Deleuge)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드 작품의 변태적 세계에서 조차도 권리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는 그 진실의 빛을 발하며, 역사철학에 대한 패러디 속에서 문학적 요소로 탈바꿈한다.?새디즘은 심오한 정치적 통찰력’ 혹은 혁명적 저의’를 깔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가학적으로 새디즘화되는 사회에서 정치적 통찰력을 심오하게 사유하는 해방적인 새디즘 매니아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세계에만 푹 빠져 있는 폐쇄적인 매니아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유목민적인 매니아로 전환되어야 한다.


불안정한 자아의 정박지

매니아는 자칫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불안정한 자아 정체성을 안정적인 자아로 만들겠다는 매니아의 자아 계획적 함정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때의 이방인은 심각한 수준에서 고립되고 만다. 불안정한 자아의 세계에서는 줄곧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매니아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정박지점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이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다’는 대답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만화 매니아, 벤처 매니아, 영화 매니아, 사이버 매니아, 게임 매니아, 스노보드 매니아... 등.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는 강자에게 어쩡쩡하게 의존하려는 인간형을 경멸했고, 스스로 서는 자율적 주체를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매니아는 어찌 보면 자기세계를 깊이있게 파고드는 자율적 주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매니아적 자율적 주체성은 대개 스스로를 이방인화하고, 미친 녀석’이라는 욕을 듣곤 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폐쇄화하는 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오로지 그 세계만으로 천착하지 다른 세계와는 소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류의 편집증적인 매니아는 자신을 철저히 파편화시키면서 세계의 다른 가치들과는 담을 쌓는다. 그리고 미친 녀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매니아적 대상을 업신여기는 낡은 통념에 기인한다. 대학생이 영화에 미쳐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의 부모는 그더러 공부는 안하는 미친 녀석’이라 불호령을 내리기 일쑤일 거다. 실제로 어떤 부모는 어느 여대생이 춤매니아가 되자 다음과 같이 훈계한 바 있다. 네가 학교 신문사나 방송국에 들어갔으면 그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네 인생에 힘이 되어주었을 것이며 사회에 나가서도 이끌어줘서 장래에 정말 좋을텐데, 뭔 놈의 춤동아리를... 그것도 3기? 맨날 춤춰서 뭐먹고 살래? 사, 오십 살이 되어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니? 주변에도 순 너같은 녀석들 밖엔 없을 것아니냐?"

매니아는 실제로 창조자이다. 어떤 세계에 몰두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재창조 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지가 없다면 그는 이미 매니아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보면,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모두 매니아적 기질을 가진다.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도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터다. 그리고 미친다는 것은 삶의 열정을 의미한다. 혼탁한 자아 정체성으로 표상되는 현대사회에서의 삶의 열정은 그나마 내가 누구임’을 선포하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리고 선행자들에게 도전하는 삶의 창조적 모험이기도 하다. 그것이 개인적 고립주의로 된다 할지라도 그의 창조적 성과는 그의 손을 떠나 사회와 인류에게 이바지하기도 한다. 아이러니컬한 효과이긴 하지만 고립된 매니아일지라도 그의 창조물은 이미 세계-내-존재로서 연대성을가진다.

그러나 매니아적 창조성이 갖는 중요성은,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버림받는 존재와 가치들에 대해 열정을 뿜어내면서, 기존 질서에 균열을 가하면서 카오스적 전복을 꾀한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만화 매니아들이 그러하다. 만화가 전통적으로 나쁜 것’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이제 긍정적으로 전환된 것은,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문화산업적 논리 이전에 만화 매니아 인구층이 두텁게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의 매니아들이 산업화되고 상품화되거나 문화권력자로 위치화되는 성향은 성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새디즘화되는 사회에서 그야말로 가학적 새디스트로 스스로를 파괴시키고 만다. 게임 매니아들은 이 세계를 전쟁하는 일상으로 재생산시키면서 타자들을 살상하는 쾌감의 오르가즘을 체험한다. 이런 경우 기존 질서에 균열을 가하기는커녕 기존 질서를 맹목화하는 데 협력한다. 벤처 매니아들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해커적 매니아가 더 해방적일지 모른다. 그가 자본주의, 관료주의, 권위주의 질서, 즉 기존의 사회적 생산의 논리를 비웃으며 인간이 욕망하는 주체를 탐닉한다면 말이다.

새폐쇄적 세계에서 개방적 세계로 나와야

매니아란 단순히 미쳐버린 문화적 취향자’가 아니다. 이 세계를 삽질하고 거름주고 또는 폐수로 오염시키는 행위자들이다. 따라서 매니아들에 대해 어느 한 시각으로만 말할 수가 없다. 앞에서 본 것처럼 창조자이되 사회와 인류에 진정 거름을 주는 창조자이기도 하고 그 반대의 야욕자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오늘날에 있어서 매니아란 데카르트(R. De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와 같은 코기토적 주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자기동일시적 주체가 아니라 이질적 요소들의 분열증적 주체라는 것이다. 과거의 우표수집과 같은 관조적인 모던적 매니아 주체는 이제 포스트모던한 매니아 주체 앞에서 명함도 못내밀게 되었다. 포스트모던한 매니아 주체는 이 세계에 내기를 거는 창조자이자 정복자이며, 어느 한 곳에 쉬 정박하지 않으려는 이질적 감각주의자들이다. 그래서 라깡(J. Lacan)은 이렇게 말했나보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이 명제야말로 아마도 포스트모던한 매니아들에게 최고로 적합한 공리가 아닐까? 한곳에 정박하는 듯 하지만 창조자로서 혹은 정복자로서의 매니아는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다. 이제 매니아는 더 이상 폐쇄적일 수 없는 것이다. 매니아는 정글의 숲에 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니아는 불안정한 세계-내-존재를 벗어날 수 없고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내기위해 심취하고 있는 위태로운 탈주자이다.

매니아는 이제 이 세계와 대화할 필요가 있다. 게임 매니아든 영화 매니아든, 아니면 좀더 조용한 바둑 매니아든, 자아-내-존재로서가 아니라 세계-내-존재로서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에 대해 내기를 걸어야 한다. 매니아가 거처하는 바로 그 자리를 바꾸어내고,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흐름도 바꾸어낼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적 의미화가 일어나야 한다. 매니아적 창조성이 이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욕으로 가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선포할 뿐이다. 컴퓨터 매니아 빌 게이츠의 정복욕이 전지구적 민중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면 지나친 예일까? 벤처 매니아로 성공한다는 것이 결코 화폐의 노예화, 그리하여 타자들을 가학하는 새디즘화의 결과여서는 곤란할 터이다. 매니아의 창조성은 불안정한 사회에서 폐쇄적인 자아 정체성으로 새디즘화될 게 아니라, 개방적인 유목적 탈주자로 연대하는 해방적 주체로 접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매니아의 본령일 터이다.

매니아가 편집증자로 귀속되는 것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자기동일성으로 누적되는 게 아니라 차이들의 접속으로 자기 세계를 창출하는 분열자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래서 차라리 진정한 새디스트가 되자. 가학자가 되지 않는 새디스트, 그리하여 욕망의 해방자가 되는 새디스트, 요컨대 우리의 욕망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약탈해가는 새디스트에 저항하는 새디스트. 우선 자본이 당신과 계약하자고 하거든 당신은 새디스트적 웃음으로 일갈하라. 웃기기 말라, 라고. 그래도 법을 들고 나오거든 더 심하게 비난하라. 인류의 적! 그렇게 외칠 때 비로소 당신은 자본의 잉여가치 증식자로 노예화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치를 창출하는 진정한 매니아가 될 것이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말자. 필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이다.

(주)sadism
편태성욕(성도착)의 한 종류.가 학성애라고도 한다. 즉, 성 대상에게 고통을 주거나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이나 만족을 얻는 부류를 알골라그니라 하는데 능동적 알골라그니를 사디즘, 수동적 알골라그니를 마조히즈이라 한다 . 이 2가지 성태가 한 사람에게 공존할 수 도 있다. 사디즘은 오스트리아 의학자 R. 크라프트 에빙이 프랑스의 귀족작가 D.A.F.사드의 실생활이나 소설중에서 전현적으로 표현한 성행동을 관련시켜 명명한 것이다. 성 대상에게 고통을 주어 성적 쾌감을 얻어 절정에 이르므로 정상성교를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성목표에 한정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람을 사디스트라 한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