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7-08 : 매니아 문화의 현상과 양태 - 극단적 문화 개인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HS애드 공식 블로그 HS 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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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문화평론가

인터넷 라디오방송국 'SaGa'

지난 번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N세대 특집 프로그램을 우연히 본적이 있었다. 디지털 세대들답게 컴퓨터와 함께 하는 그들의 생활은 기성세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하고 편하고, 효율적으로 비춰졌다. 프로그램 중간쯤 되었나, 10대들이 모여서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고 있는 ‘사가(SaGa)’라는 팀을 소개하는 장면이 눈에 확 들어왔다. 놀랍게도 이 방송국의 구성작가는 초등학교 학생이었다. 이 팀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천안의 한 여고 학생은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문화생산자’로 불러달라고 말한다.

10대들의 문화를 단순히 소비문화로만 재단할 수 있을까? 이제 10대들은 사춘기 감수성에 젖어, 좋아하는 연예인 뒤꽁무니만 따라 다니다 용돈만 축내는 아이들이 아니다. 자신의 문화적인 즐거움과 욕구를 항상 스타들을 통해서 보상받고, 스타와 자신을 맹목적으로 동일시하려는 정신나간 아이들로 10대들의 정체성을 일별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편견에 사로잡힌 판단이 될 것이다. 한 여학생의 인터뷰처럼 10대들은 곳곳에서 문화생산자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10대들은 대부분 문화의 생산주체이기보다는 소비주체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소비의 방식도 과거처럼 맹목적인 ‘사재기’나 ‘모방하기’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취향에 맞게 개발한다. 소비도 생산적일 수 있다면, 청소년 세대들에게 ‘문화매니아’는 소비와 취향의 생산적인 공간을 찾아가는 중요한 교차로가 된다.

겁없는 10대들의 초상화는 폭력서클이나 원교조제와 같이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사이버공간에서, 만화공간에서, 테크노스튜디오에서, 축구경기장에서 돈만 내는 손님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판을 짜는 ‘겁없는 주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소위 문화매니아층은 이제 20대에서 10대로 그 저변이 확대되고 있으며, 10대들로 구성된 문화의 매니아층들은 매니아문화 자체를 새롭게 재편하고, 자신들의 생산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매니아 문화의 겉과 속

매니아는 보통 특정한 분야에 전문가들 못지 않은 정보와 광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 문화 매니아는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 게임, 코스튬플레이(costume play) 등 특정한 분야에서 단순한 취미나 기호를 넘어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문화주체들이다. 그들은 특정한 분야의 문화에 대해 편집증적인 집착을 보이며, 심지어는 그 분야에서 적극적인 생산자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매니아 문화가 생겨나게 된 사회적인 배경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매니아 문화는 어떠한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이 이야기를 해보자.

대중문화의 천국 일본에서 매니아 문화가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은 80년대 초반부터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매니아 문화를 보통 ‘오타쿠(otaku)’ 문화라고 하는데, 이 오타쿠 문화의 출현배경에는 유교 중심의 가부장제와 조직 중심주의의 일본사회에 대한 청(소)년 세대들의 정서적인 반발감이 자리잡고 있다. 조직과 전체를 위해 개인의 복종과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기성사회에 청(소)년 세대들은 식상함을 느끼고 철저한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는데, 이때 특정한 문화매체에 대한 선호는 그러한 개인의 독립공간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선택이 되었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작고 세밀한’ 문화에 대한 탐닉(요컨대, 미니멀리즘 문화)과 문화산업의 기술적인 성장이 일본 오타쿠 문화를 만드는 촉매제로 기능한다.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근대적인 가족중심의 유교사회 체제의 붕괴, 소비문화의 비약적인 성장, 디지털문화의 지배적인 출현 등이 청(소)년 세대들에게 문화를 경험하는 기회를 확대시켜주었다. 문자보다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이른바 영상세대로서, 그리고 문화를 삶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생각하는 문화주체로서 청(소)년 세대들은 삶의 가치와 일상의 만족의 좌표가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그려진다. 또 한가지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것은 더욱이 매니아 문화가 한국에 정착하게 된 데에는 인터넷문화의 활성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문화동호회들을 중심으로 한 사이버 상의 문화매니아 활동은 오프라인에서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문화적인 결속력을 높이고, 다시 오프라인에서의 문화생산을 확대시키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다면 매니아 문화는 어떤 성격을 가질까?

첫째, 매니아 문화는 문화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매니아는 보통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과 같은 문화장르뿐 아니라 공룡, UFO, 전쟁모형 등과 같은 아주 희귀한 비문화 영역의 분야를 일상적인 취미로 전환하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는 예의 오타쿠문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으로서, 일상적인 취미의 수준을 문화적인 수준으로 의미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둘째, 매니아 문화는 이제 장르보다는 취향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과거에는 매니아 하면 대체로 영화광, 음악광, 만화광 등으로 특정 장르에 전문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을 지칭했다. 그러나 지금은 호러매니아, 하드코어매니아, SF매니아 등과 같이 개인의 취향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성격이 매니아를 규정하는 의미로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매니아 문화가 훨씬 더 미세한 분야로 소수화되고, 분자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매니아는 문화의 소비와 생산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가령 NBA농구에 빠져있는 한 10대 아이는 30개나 되는 팀들의 이름뿐 아니라, 각 팀의 주요 선수들의 신상에 대해서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는 각 팀의 전술운영이나 감독들의 작전 특성까지 잘 알고 있다. 이 학생에게 NBA는 단순히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의 대상이 되는것이다.

매니아, 야누스의 두 얼굴

청(소)년 세대들의 매니아 문화 등장은 문화의 영역이 그만큼 다원화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10대들은 이러한 문화 영역의 변화를 어느 세대보다도 잘 감지하고, 그 변화의 내용들을 자신의 문화로 만들 줄 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문화 테크놀러지의 변화에 따른 청소년들의 문화 감수성의 생성일 것이다. 문화와 기술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보길 원하는 10대들은 문화의 테크놀러지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뮬레이션 게임에 빠지고, SF적 스타일을 선호하고, DDR을 좋아하는 10대들은 테크노문화의 영역에서 많은 매니아 그룹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청(소)년 세대의 매니아 문화의 새로운 경향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문화 매니아적 감수성이 포스트자본주의 시대의 극단적인 문화적 개인주의와 나르시시즘을 반영한다는 지적도 분명 일리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문화 매니아적 현상은 문화가 공동체의 성격을 상실해가는 과정에서, 문화가 자본주의의 상품 형태로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특히 청소년들이 대단히 미세한 문화적 부분을 자신의 취향과 연결시켜보려는 욕망에는 극단적인 초개인주의가 숨어 있다. 10대들이 방에 틀어박혀 밤샘을 하는 것이 지겹지 않은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역설적으로 보자면 근대적인 의미의 공동체가 이제 10대들에게 무의미하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가부장제 가족주의, 입시위주의 학교체제, 위계적인 사회질서가 주는 집단의 무의식적인 강요들이 그들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는 통로로서 매니아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그런 점에서 매니아 문화는 부모 세대들의 사회적 모순들을 직접 해결하기 보다는 마술적으로, 상상적으로 해소하려는 의미가 강하다.

청(소)년의 매니아 문화는 단순히 개인주의적이지만, 탈역사적이지만도 않다.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 그룹인 ‘붉은 악마’들 구성원의 상당 부분이 10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물론 안정환, 고종수 등의 개인 스타들에 대해 광적인 관심이 있지만, 집단적인 흥분과 열기를 선호한다. 인터넷 상의 다양한 문화 매니아 소모임들의 경우도 새로운 형식의 네트워크를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해나가고 있다. 매니아 문화가 단순히 소비문화로만 평가되지 않는다면, 그 안에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생산을 가능케 하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들이 매니아적 감수성의 실험을 통해서 앞으로 대중문화의 생산주체로 성장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매니아적 감수성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이다.

Posted by HS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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