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08 : Special Edition - LG애드 창립 20주년 특집 - 4. 연대별 성장기/ 창립이전기/LG애드/ Re-birth LG애드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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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ion4 - LG애드 창립 20주년 특집
 
  스무 살의 ‘靑緣’, 무한한 미래를 보다  
편 집 실
 
 

50년대의 광고활동 : 국내에 광고개념 전파 역할 톡톡

사실 1950년대, 국내에는 광고의 기법은 물론, 그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광고 불모지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락희화학·럭키금성의 광고활동 하나 하나가 광고사에 뚜렷한 족적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대적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친 직후의 혼란과 전쟁, 분단 등의 정세에 따라 경제활동이 미미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서면서 도입한 민간 상업방송은 전파 미디어의 위력을 보여주면서 명실상부한 매스 미디어·매스 커뮤니케이션 시대로의 발전을 촉발시켰다. 이는 특히 금성사가 1959년에 국내 최초로 개발한 라디오를 시발점으로 하는데, 이러한 국산 라디오의 출현은 방송은 물론 광고산업 발전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또한 자본주의 문화의 한 상징이라 할 만한 콜라가 국내에 상륙한 60년대 후반, 호남정유가 국내에 미국의 마케팅과 광고를 도입해 우리나라 광고산업에 자극제 역할을 하면서 근대적 광고산업의 정착은 물론, 광고대행업이 하나의 기업활동 영역으로 등장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락희화학이 50년대 후반 국내 최초로 개발한 럭키치약의 판매를 본격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선전업무가 강화되었다. 신문·잡지 광고를 필두로, 주요 역의 대합실 등에 치약 모형을 제작하여 부착하거나 가두 광고캠페인을 벌이는 활동이 전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소비자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제품을 알리기 위해 제품의 편리성과 특·장점을 고지하면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광고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또 이 무렵, 락희화학과 금성의 상표가 디자인되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표현기법도 그 동안 주류를 이루어 온 설명 위주에서 탈피해 디자인 중심의 광고로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60년대의 광고활동 : 그룹 광고 업무의 단초 마련

1960년대에 들어 정식 조직은 아니었지만 락희화학 서울사무소에서 락희화학·락희유지·금성사 광고담당자들이 모여 상호 협의하는 그룹 광고 성격의 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이어 1962년 11월 락희화학 서울사무소에 정식으로 선전실이 만들어져 각 사의 광고담당자들이 광고기획 및 매체 집행, 광고 디자인 등으로 역할을 나누어 수행하면서 락희화학·락희유지·락희비니루·금성사·반도상사 등의 광고업무를 일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은 1965년에 선전실장이 임명되면서 총 6명의 직원이 각각의 역할을 나눈, 최초의 락희화학 광고업무 담당기구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후 각 사별로 선전업무의 전문화가 요구되면서 1966년 1월 선전실이 해체되고 광고업무가 각 사로 분산되는 변화를 갖게 되어, 락희화학은 영업과에, 락희유지는 기획과에 광고업무가 소속되었고, 금성사는 별도의 선전과를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968년 락희화학이 락희유지를 합병, 종합 화학회사로서의 기틀을 다지면서 양사의 광고업무 기능을 통합하고 선전과를 정식으로 발족했다.
1960년대 초기 국내 기업의 광고는 주로 신문·잡지 등 인쇄매체를 이용한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락희화학은 단순한 상품 광고의 틀에서 벗어나 소비자에 대한 제품안내, 서비스, 경품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또한 신문광고에 디자인을 가미한 통단광고(5단×30cm)를 기획, 게재하면서 광고기법의 발전을 모색하는 가운데, 광고 본연의 기능인 소비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아울러 방송광고와 관련해 1963년에 토요일 쇼 프로그램인 ‘럭키그랜드 쇼’에 스폰서로 참여, 최초의 TV프로그램 스폰서가 되기도 했는데, 그 CM Song이 소비자들에게 널리 불려지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한편, 1966년 8월부터는 국내 최초의 흑백 TV 생산과 함께 본격적인 TV광고가 시작되면서 서서히 이미지 영상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게 되었다.

70년대의 광고활동 : 광고대행사 체제로의 기반 구축
1970년, 금성판매는 락희화학 선전과를 선전부에 통합하고, 락희화학과 금성사, 그룹 계열사의 광고업무를 통괄 담당하도록 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하우스 에이전시가 탄생하였다. 당시 선전사업부는 2부 5과로 구성되었다. 그 중 관리부는 관리과와 부산 주재로 구분되어 사업계획 및 4대 매체 관리를 주로 담당했고, 기획 부문은 기획 1, 2, 3과가 지면 광고물 제작·빌보드·전시·인쇄물·포장업무 등을 맡아 진행했는데, 그 업무가 1971년에 다시 락희화학으로 이관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서는 그룹의 성장과 더불어 홍보·광고 업무가 증가함에 따라 1975년에 조직 명칭을 선전사업부에서 홍보실로 변경하는 한편, 제작부문에 아트디렉터제를 처음으로 도입하는 등 업무 규모와 체제가 더욱 발전적으로 변모했다. 그 가운데 1974년에 락희화학이 럭키로 사명을 변경하고, 1976년에는 럭키 홍보실에서 관장했던 그룹의 광고업무를 럭키개발로 이관했다가 1978년 금성사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1970년대는 활발해진 판매활동과 함께 광고활동이 본격화되었다는 데에서 주목할 만한 시기이다. 제품광고를 비롯해 각종 전시회 참가, 광고탑 건립, 상설 전시관 설치, 부산역 앞 초대형 네온 간판 건립 등의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의 활동이 전개된 것이다. 특히 1970년 국내 최초로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광고노래 현상공모를 실시, 총 3,537편이 응모되는 높은 호응 속에 소비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국내외의 광고상 수상 실적 또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막 신설되기 시작한 국내 광고상에서 괄목할만한 실적을 거두는 한편, 1978년에는 호남정유의 별표 백등유 광고가 국내 최초로 클리오(Clio)에서 파이널리스트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어서 1979년 일본 ACC상 국제부문에서 금성사 샛별TV 극장광고가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 광고제에서의 수상이 줄을 이었다.

1978년에는 그 동안 소속이 바뀌면서도 기능과 역할이 계속 확대되어 오던 홍보·광고 관련 업무가 희성산업에 이관, 통합되면서 마침내 선진 대행사 체제로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이에 희성산업은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시행하면서 국제담당을 신설하고 미국인을 채용하는 등 벌써 글로벌 시대를 대비하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1970년대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지속적인 추진과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두 자릿수를 웃도는 GNP 성장을 이룩했다. 또한 1977년 수출액 10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광고 분야 또한 이러한 성장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1970년 GNP의 0.47%(127억 원) 규모였던 광고비가 1978년에는 무려 13배가 넘는 0.79%(1,699억 원) 규모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다. 또한 업종별 다변화도 이루어져, 60년대 제약업과 식품업 등이 주도해오던 주 광고 업종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자·자동차·기계·식품·섬유·화장품 등으로 확대되었다. 아울러 1971년 범汎)광고인의 모임인 ‘한국광고업협회’가 설립되는 한편, 각종 광고상 제도가 제정되면서 새로운 광고문화 정착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미디어 분야에서는 흑백TV가 절대적인 대중매체로 자리잡으면서 컬러방송으로 전환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신문도 컬러인쇄를 확대하고 지면 증면에 나서는 등 미디어 시장도 광고산업 발전과 함께 확대·발전되게 되었다.

 

1984년 이전의 광고활동 : 독립광고회사로의 발돋움 채비

희성산업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가 폭등으로 인한 원가 상승 등 국내외 경제여건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불황 극복에 역점을 두어 ‘광고의 효율성 제고, 기업의 전문성 제고’를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이에따라 1980년대 초반, 희성산업은 독립 에이전시로 나아가기 위한 체제 확립과 그룹의 해외광고 강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는 효율성 제고를 내세우는 한편, 1982년 광고부문에 팀 운영제도를 도입하고 업무전산화 추진 계획을 확정했다. 또 광고부문의 선진 기법 도입을 위해 외국 광고회사와의 제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조직의 전문화를 꾀하는 등 독립광고회사 탄생의 토대를 다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광고자료의 발간, 리뷰 제도의 활성화, 광고 워크숍 개최, 광고경진대회 실시, 외부 광고주의 마케팅 조사 등에 주력하는 등 광고 기능의 전문적 확대를 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드디어 1984년 광고사업부를 별도 법인체인 ㈜엘지애드로 독립시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희성산업은 1980년 연암 구인회 럭키금성 창업회장의 창업정신과 그룹의 성장 및 경제 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기리고, 이를 그룹 임직원과 대외에 인식시킴으로써 그룹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부산에 연암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전시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이어서 1982년에는 건국 이래 최초의 국제박람회인 ’82 서울국제무역박람회(SITRA ’82)에 참여한 럭키그룹관의 기획 및 제작, 운영을 담당하는 등 전시사업을 확대하게 된다.

LG애드의 창립과 정착

럭키금성의 광고 부문은 1962년 11월 락희화학 선전실로 발족한 이래 20여 년 동안 국내 광고산업의 토양을 일구어 오면서 우리나라 광고업계의 발전과 성장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 또 이 과정에서 축적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광고사업을 보다 전문화시키기 위해 1978년 희성산업을 당시 럭키그룹의 홍보 및 광고를 전담하는 전문광고회사로 개편하였고, 이를 계기로 희성산업은 국내 굴지의 하우스 에이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은 10·26에 이은 광주민주화 항쟁, 그리고 언론통폐합 및 방송의 공영화 등 혼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컬러방송의 송출과 더불어 이듬해인 1981년 TV광고가 컬러화됨으로써 미디어의 색채 혁명을 통한 이미지 창출 효과가 극대화되면서 기존 4대 매체에 대한 격변이 예고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에 등장한 제5공화국의 새로운 언론·광고 정책에 따라 1981년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가 설립되어 전파광고를 일괄 대행하게 되면서 전파광고 대행자격 인정제도의 시행 등 광고산업 환경이 변화되었다. 또한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조치에 영향을 받은 한국신문협회 광고협의회도 ‘군소대행사의 난립으로 인한 부조리 척결 및 신문광고 거래질서 확립’을 명분으로 신문광고 대행자격 인정제도를 시행했다. 미디어 분야와 관련한 이러한 일종의 규제로 인해 한국 광고업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에 일단 제동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고 광고 규모도 대형화됨에 따라 광고량이 많은 주요 그룹들이 별도의 광고회사의 신설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1980년 오리콤(두산그룹), 제일기획(삼성그룹), 희성산업(럭키그룹) 등 4개 사에 불과하던 광고회사는 1981년 해태기획(현 코래드), 1982년 대홍기획(롯데그룹)이 독립광고회사로 설립되면서 수적으로도 늘어났다. 이어 금강기획, 삼희기획(현 한컴), 동방기획(현 BBDO KOREA) 등이 가세하게 되었다.


독립광고회사 잇따른 설립으로 경쟁 심화

이 같은 광고회사의 설립 붐은 기존 자체 사업부 조직으로는 전문화된 광고회사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는데, 당시 그룹 단위로 발전해나가는 우리 기업의 특성상 광고대행을 의뢰할 적합한 광고대행사의 선정이 어렵다는 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당시 희성산업은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출범과 함께 변화한 방송광고시장에서 독립된 광고전문회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매체대행 수수료를 받지 못하는 돌발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국신문협회 광고협의회의 신문광고 대행자격 인증에도 불구하고 광고매체의 큰 축인 방송광고를 원활하게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종합광고 기능을 수행하는 데 제동이 걸린 것이다. 또 구조적으로도 광고산업의 전문화·국제화에 따라 경쟁력 유지 및 강화를 위해서는 광고 관련 전문인력의 확보가 최우선 과제였으나, 기존 하우스 에이전시 체제로는 독립광고대행사에 비해 여러 모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83년부터 광고회사의 신설 및 경쟁력 강화 방안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시작되었는데, 그 해결방안으로 ‘첫째, 독립된 광고대행사의 출범, 둘째, 현 체제를 유지하고 보강하는 방법, 셋째, 광고업무를 이전처럼 그룹 내 각 사로 분산’ 등의 세 가지 검토안이 제시되었다. 이에 광고산업의 중요성과 발전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사업자체를 포기할 수 없으며, 또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전파광고 대행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별도의 독립광고회사를 신설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60년대 이후 축적된 전통과 노하우야말로 그룹 이외의 다른 광고주들에게도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배경으로 회사 신설 결정이 내려졌다.
1984년 5월, 종합광고회사 설립이 결정됨에 따라 당시 럭키빌딩 15층 기획조정실 내에 창립사무소를 만드는 등 회사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우선 회사의 상호로 ㈜희성기획, (주)신성기획, ㈜애드인터내셔널, ㈜스타애드, ㈜코스모, ㈜크로바 등 다수 안이 제출되었으나 <주식회사 엘·지·애드(LG Ad Inc)>로 최종 결정되면서, LG브랜드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어 5월 25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고, 같은 달 30일 남대문로 5가 소재 국제화재보험빌딩에서 회사 창립총회를 가짐으로써 마침내 LG애드가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초대 사장으로는 변규칠 기조실 사장이 겸임을 하는 한편, 윤좌현 부사장 총괄 아래 관리담당 구자욱 이사, 광고담당 김문웅 이사 등의 임원진과 3본부 22부 13팀 7과의 조직을 갖추었으며, 인원은 총 142명이었다.

광고전문회사로의 토대 구축

LG애드는 독립광고회사로 출범한 이후 조속한 시기에 체제를 정비한다는 목표 아래 실무팀을 구성하고 장기 경영목표 및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 최우선 전략과제로는 ① 종합광고회사로서의 체제 정비 ② 외부 광고주 유치 ③ 국제화 추진 ④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전파광고 대행사 인정 획득 등을 설정했다.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제도·업무의 전문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우수 전문인력의 지속적인 확보, 마케팅 서비스 기능 강화, 교육 훈련 강화를 목표로 설정하고, 외부 광고주 유치를 위한 영업능력 제고, 의식 및 체질 개선, CF 프로덕션의 설치 운영 등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1985년 4월 1일, 기획과 제작이 분리되어 있던 기능별 조직 체계에서 광고주별 조직으로 전환함으로써 업무의 신속성과 책임감을 강화하는 한편, 그룹 외 광고주 유치를 위한 전담부서를 신설하는 등 회사 설립 이후 첫 조직개편이 단행되었다. 이때 모든 경영의 관건은 외부 광고주 영입에 초점이 모아졌다. 이에 따라 전사적인 외부 광고주 유치 노력을 기울인 결과, 1984년 LG애드 설립 이후 최초의 외부 신규 광고주로 태극당예식부·새로나백화점·알파화학·정우개발·코코산업 등을 영입했고, 1985년에는 경농·에스콰이아제화·이탈리아 해외무역공사·태창·안국약품·레셀우클라푸·노스웨스트항공·대한펄프 등 총 21개 사를 신규로 영입하고 25억 원의 외부광고주 취급 실적을 기록했다.

이어 1986년에는 유한양행·도투락·한국나이키를 비롯해 타이항공·레이디가구·삼익제약·청계약품·비자인터내셔널·일화·듀라셀 인터내셔널·풍원양조 등 20개 사를 추가로 유치하고, 외부 광고주 취급액 100억 원을 돌파하면서 전파광고 대행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은 곧 조직의 발전적 개편과 업무 역량 강화 노력으로 이어졌다. 우선 기존의 매체부를 전파매체를 담당하는 매체 1부와 인쇄매체를 담당하는 매체 2부로 확대하는 등 전파광고 대행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직정비 작업을 착실히 준비해나갔다.
또한 광고 크리에이티브 역량 강화에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건 물론이다. 광고 크리에이티브의 향상과 도전 의욕 고취를 목적으로 희성산업 당시부터 실시해온 홍보·광고경진대회는 LG애드 출범과 더불어 제6회 대회부터 그 명칭을 ‘LG애드 광고경진대회’로 바꾸어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 경진대회는 매년 말 회사 전임직원이 팀별로 조를 구성하고, 과제 광고로서 다음해 그룹광고안을 제작, 제출토록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또 1986년에는 LG애드 내 카피라이터의 자질 향상과 국내외 새로운 광고기법에 대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하는 LG애드 카피연구회가 발족되었는데, 이 연구회에서는 매월 1회 정기 세미나 및 반기 1회의 합숙 워크숍 등을 펼치고 교육자료집을 발간하는 등 광고의 질적 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크리에이티브 향상을 위해 시행하는 제도 가운데 현재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는 단연 ‘CRB(Creative Review Board)’를 꼽을 수 있다. CRB는 객관적인 광고입안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광고제작물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며, 제작 부문의 자질 향상 및 개발의 동기를 부여한다는 취지 아래 1984년 5월부터 시행된 제도이다. 이는 LG애드가 기획·제작한 광고제작물을 매체에 노출시키기에 앞서 사전에 검토·평가하여 제작방향을 제시하거나 조언을 하기 위한 상설 회의기구로 운영되었는데, 위원은 광고담당 이사와 기획본부장 및 관련 전문가와 관리자로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LG애드 광고제작물의 크리에이티브 향상과 광고주 만족도 제고에 기여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으로, 그 성과는 1986년 제6회 한국방송광고대상의 대상(금성사 시력보호 TV), TV부문 최우수상(도투락만두), 라디오부문 우수상(럭키 하이크림 D 비누) 등의 수상 실적으로도 증명되었다.
LG애드는 또한 우리나라 광고산업 발전을 위한 노력에도 앞장섰다. 먼저, 광고 전문인력의 확보를 위해 우수 인재에 대해서는 수시 채용을 단행하는 한편, 우수 인재의 조기 확보를 위해 1984년 7월부터는 국내 광고회사 최초로 기업 인턴제도를 시행하면서 광고인을 꿈꾸는 대학생들의 높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더불어 창립 이듬해인 1985년에는 경제적·사회적 중요성에 비해 광고인들의 광고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하다는 인식 아래, 광고이론의 체계화와 새로운 광고정보의 전달을 통해 광고인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사보 <엘지애드>를 창간했다. 이러한 사보 발간을 통해 건전한 광고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광고주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간접적 커뮤니케이션채널 역할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사보 <엘지애드>는 특히 매월 광고업계 전반의 현안이나 새로운 광고이론, 그리고 선진 외국의 앞선 노하우 등을 시의 적절하게 주제로 선정하고 심층적으로 다룸으로써 국내에 부족했던 광고이론 체계화에도 기여해왔다. 아울러 당시 비중이 높아져 가는 마케팅과 매체기획·SP·PR 등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토털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의 실현이라는 회사의 비전을 실천하고 이를 전파하는 종합 커뮤니케이션 전문지로서 그 면모를 다져왔다.
이외에도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사원 복지제도의 확대와, 임직원 사이의 팀워크를 다지는 사내 프로그램도 동시에 진행했다.
1985년 1월 사원 복리후생제도 개선의 일환으로 장기근속자 포상 기준을 상향 조정하는 한편, 경조휴가 및 축의금 지급 기준을 개선했다. 또 회사 내 건전한 사풍 진작을 위해 사원들의 친목활동인 인포멀 그룹의 활동을 적극 지원, 테니스회·볼링회·야구회·사진회·축구회·낚시회 등을 통해 임직원들이 더욱 융화·단결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시행한 이러한 사내 커뮤니케이션 활성화 지원책을 통해 단기간에 경쟁회사보다 높은 로열티를 유지하는 한편, 화기애애한 사내 분위기 조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또 이런 비공식적 모임의 지원 외에도 매년 연말 전임직원이 참여하는 합숙 워크숍을 개최, 광고인의 미래, 조직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는 가운데 팀워크 배양을 위한 트레이닝 프로그램과 단합의 시간을 가지며 내실을 다지기도 하였다.
한편, 출범 첫 해 LG애드의 취급액은 전년 실적 265억 원에 비해 51.3% 성장한 401억 원 규모를 기록하면서, 국내 최고 광고회사의 반열에 당당히 합류했다. 이후 1985년 극심한 경제침체로 광고산업이 위축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출범 3차년도를 맞아 ‘선진 86-행동과 능률의 해’라는 경영방침을 세우고 광고 크리에이티브 능력 배양과 내실경영을 위한 전사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 다시 491억 원 이상의 취급액을 기록했다.


종합광고회사로 성장 (1987~1989)

LG애드는 1987년 2월 1일자로 전파광고 대행자격을 획득, 창립 후 숙원사업을 해결하면서 종합광고회사로서 그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다.
그 실제적 효과도 커, 한국방송광고공사로부터 계열사 광고비의 5%, 비계열사 광고비의 7%에 해당하는 매체 대행 수수료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경영여건이 호전되었음은 물론, 그 동안 광고주로부터 받아오던 수수료를 받지 않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광고주 영입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창립 2년 반만에 전파광고 대행자격을 획득한 것은 LG애드 전임직원이 하나로 뭉쳐 이루어낸 초창기 회사 경영의 최대 성과로서, 이는 명실상부한 종합 광고회사로의 새 출발을 의미한다.
LG애드는 이에 발맞춰 경영조직의 활성화와 광고주 서비스 강화를 목적으로 광고산업의 특성에 맞는 조직체로의 개편을 단행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설립 후 2년여 동안 유지해왔던 일반 회사의 직위 명칭인 과장·부장·본부장을 차장·부장·국장으로 변경하고, 국 단위 중심으로 업무 추진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매체국과 제작지원국을 신설하는 등 조직을 6국 5부(실) 18팀 6과로 확대 개편했다.
1987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는 해라고 볼 수 있다. 회사 설립 후 숙원사업이었던 전파광고 대행자격을 획득함은 물론, 연말에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소재 럭키금성 마포빌딩으로 사옥을 이전하면서 LG애드 마포시대를 개막했기 때문이다. 이 사옥 입주 초기에는 총 17층 가운데 15~17층의 3개 층을 사용했다.
또한 광고주 영입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 1987년 동양제과를 필두로 미원·오리엔트·시대복장·아세아 종합기계·일진농상·신신제약·벽산·해태유업·인터콘티넨탈호텔·오리온 프로토레이·한덕개발(서울랜드)·상업은행·신한은행·대현(페페)·현대통상 등이 신규 광고주로 영입되었다. 이어 1988년에는 LG신용카드·T&T·하얏트호텔(서울·부산·제주)·고려제약·선경폴라로이드사업부·동부산업 등을 영입하였다.
이로써 1989년 말까지 LG애드에 광고를 의뢰한 광고주는 그룹 내부 18개 사, 외부 45개 사 등 모두 63개에 달했다.

크리에이티브 능력 배양에 박차
한편, 광고기능을 전문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노력도 다양하게 이어졌다. 우선 1980년대 중반부터 복잡해진 시장상황과 다양해진 광고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마케팅 부문의 강화가 추진되었다. 이에 1988년 4월 1일자로 단행된 조직개편을 통해 마케팅국과 마케팅부를 신설하고 광고의 과학화를 추진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9년 9월 광고제작물의 크리에이티브 향상과 광고효과 제고를 위한 시스템 ‘LATS(LG Advertising Test System)’를 개발했다. 광고물에 대한 사전·사후 조사시스템인 LATS는 LG애드가 제작한 광고물을 매체에 집행하거나 광고주에 시사하기 전에 커뮤니케이션 대상인 소비자 반응을 조사하여 최종 제작에 반영함으로써 광고효과의 제고를 도모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또 매체에 게재된 뒤에는 경쟁광고와 비교하여 그 효과를 사전에 측정해 봄으로써 새로운 광고활동에 참고하는 사전·사후조사로 나누어 시행되었다.
크리에이티브 혁신을 위해서는 전문인력의 보강에 중점을 두는 한편, 1987년 2월부터는 제작팀이라는 명칭 대신 크리에이티브팀이라는 조직명을 사용하면서 관련 부문 직원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키며 크리에이티브 혁신 의지를 표출했다.
이어 1989년 하반기부터는 LG애드가 제작·방영, 또는 게재한 광고물을 대상으로 우수 광고물을 선정, 포상하는 ‘LG애드 크리에이티브광고상(LGCA : LG Ad Creative Awards)’을 마련,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로 나누어 실시했다. 아울러 직무능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해외연수 또한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이러한 크리에이티브 혁신 노력은 1987년 제7회 한국방송광고대상 최우수상(럭키 드봉 에스코트화장품)을 비롯, 1988년에 일화 맥콜, 1989년 금성사 VTR 수퍼메리트, 1990년 럭키 랑데뷰샴푸 TV광고 등의 한국방송광고대상 3년 연속 대상이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또 1987년 4월 International Culture Graphic Art Fair에서 최우수상(럭키금성 캘린더)을 수상하는 한편, 1988년 뉴욕페스티벌 파이널리스트(일화 맥콜 2편), 1989년 클리오(Clio)상의 TV광고 컴퓨터그래픽스 파이널리스트(금성사 테크노피아 로봇편), 뉴욕페스티벌 TV광고 애니메이션부문 파이널리스트(금성사 아하카세트 세대교체편)에 선정되는 등 해외의 각종 광고제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연암사이언스홀 등으로 SP 사업 급성장
또 SP부문은 기존의 경험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LG애드 SP팀은 럭키금성 그룹의 여러 전시관·기념관 건립 및 다양한 전시회 참가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다른 경쟁사보다 한발 앞선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특히 1986년 건립에 착수하여 1987년 럭키금성 트윈타워 준공과 함께 개관한 연암사이언스홀의 기획·시공·전시·운영 경험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연암사이언스홀 관련 진행 업무는 미래의 역군이 될 초·중·고등학생들에게 럭키금성의 첨단 과학기술을 알리고, 이를 통해 미래에의 꿈과 비전을 심어준다는 목표로 추진된 국내 최초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또 오리온 초코파이·오리엔트 시계 이벤트 등 SP부문 최초로 외부 광고주를 유치하는 성과를 거두는 가운데, 판촉물의 기획·제작, LED(Light Emitting Diod)를 이용한 부산시 지하철 행선지 안내 게시기 설치 및 이벤트 부문 진출 등을 통해 사업영역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대학생 광고대상 시행 등 사회적 역할 다해
이와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창립 5년을 맞는 1988년, 대학생들에게 광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광고산업에 대한 호의도를 증진시키려는 취지로 ‘대학생 광고대상 공모전’ 행사를 신설한 것도 그 하나였다. 이는 광고를 전공하거나 광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광고를 제작할 수 있는 실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산학협동의 장이 되고 있는데, 수상 학생들에게는 상금과 더불어 인턴사원으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등 전문 광고인 양성의 초석으로서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한편, 전파광고 대행자격 획득과 광고주의 적극적인 유치, 크리에이티브의 지속적인 혁신, 마케팅 조직의 강화 등 부단한 성장과 새로운 노력의 결과 LG애드의 취급액 규모도 급등하게 되었다. 설립 첫 해 400억 원으로 시작한 취급액이 출범 6년 만에 1,000억 원을 돌파하면서 업계 2위 자리를 차지했다. 또 전체 광고비 중 TV광고비 비중이 증가하면서 전파광고 대행의 효과를 실감하게 되었다. 
 

No.1 TMC 2000’을 향한 변화와 혁신(1990~1994)

1990년대 우리나라 광고산업은 21세기를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한 가운데 광고시장 개방으로 인한 세계화·국제화의 물결과, 광고시장의 팽창에 따른 광고회사의 급증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인 변화의 흐름이었다.
먼저, 1988년 한·미 통상장관회의의 합의에 따라 촉진된 광고시장 개방 압력으로 인해 1991년부터 다국적 광고회사의 한국 내 자회사 또는 지사 설립이 허용됨으로써 우리의 광고서비스 시장은 완전 개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공보처를 발족시키는 한편, 당시 문화공보부의 광고과를 광고진흥국으로 승격, 개편하여 광고시장 개방과 환경 변화에 대응하며 국내 광고산업의 보호·육성책 마련에 부심했다. 이는 외형적으로 1990년 한국광고 시장은 2조 원 규모를 돌파, GNP의 1.22%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광고회사의 수도 1989년부터 증가세를 보이면서, 1991년 말 기준으로 한국방송광고공사의 인정을 받아 전파매체 광고를 거래한 광고회사가 84개 사에 이르렀고, 이듬해에는 100개 사를 훌쩍 넘으면서 경쟁도 심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광고산업의 건전한 발전과 전문인력 양성 등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광고거래의 정상화와 합리화 방안 모색이 광고업계의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최고의 종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회사’를 향한 변혁
이러한 경영환경의 대변혁기를 맞아 LG애드도 1989년, 창립 5주년에 즈음하여 시대적 조류에 적극 대처하는 한편, 2000년대를 겨냥한 장기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자 ‘도전과 개혁’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제2창업운동’의 전개를 선언하였다. 광고회사 본연의 역할인 광고주에 대한 투철한 서비스를 강화하고, 신규 광고주 영입과 크리에이티브 혁신, 광고 과학화를 이루기 위한 이론의 확립과 실천적 탐구, 그리고 광고영업 및 제작을 위한 지원·관리 기능들을 하나로 응집시키며, SP·PR 등 신규 사업영역에 대한 도전을 통해 종합 광고회사로서의 성장 기반을 구축하자는 다짐이었다.
이를 위해 전체 구성원의 목표를 하나로 통일하고 조직역량을 극대화함으로써 미래의 경영환경 속에서 최고의 광고회사로 존속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비전수립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에 환경 변화 속의 생존 전략이라는 전사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관리자 워크숍을 필두로, 1989년 7월에는 부·차장급 관리자와 대리를 중심으로 한 총 26명의 비전구상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위원회는 ‘광고산업 전반의 미래 전망’, ‘마케팅 정보시스템 도입 및 발전 전망’, ‘크리에이티브 측면의 미래 전망’, ‘국제화 전망과 LG애드의 전략’, ‘LG애드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 등 분야별 연구과제를 설정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사내 의견 수렴 과정과 수 차례의 임원회의를 통해 LG애드의 잠정적인 장기 경영 비전을 ‘최고의 종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회사’로 설정하는 한편, ‘No.1 TMC 2000’을 슬로건으로 제시했다.
잠정 비전의 전체적인 방향은, 그룹 자매사 광고 관련 서비스를 고품질로 제공하고, 외부 광고주의 적극적인 영입을 통해 그 비중을 확대시키는 한편, 기존 사업영역의 강화와 더불어 신사업, ‘뉴미디어의 확대, 국제광고의 활성화,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문인력의 중점 육성’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담겨져 있었다.
이를 위해 1990년 2월에는 장기 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V추진본부가 사장 직속의 상설기구로 신설되었다. V추진본부는 사무국 산하에 4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3C 분석, 환경분석 등의 현상 파악을 통해 광고시장의 미래에 대한 예측 업무부터 착수했다. 그리고 우선 사내 기업문화 의식조사를 실시해 LG애드의 장단점을 발견해내고 이를 회사의 행동규범 및 사훈제정에 참고자료로 활용하였다. 이어 V추진본부의 대표위원들로 구성된 선진 모델기업 방문단이 일본의 덴츠(電通)를 방문하는 등 다각도의 검증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이윽고 9월 18일 ‘LG애드 비전선포식’을 통해 확정된 비전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확정된 LG애드의 비전은 자율경영체제를 기반으로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과 광고주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4대 매체 중심의 광고회사에서 향후 최고 수준의 종합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회사로 도약하는 것이었다. 이때 제정된 LG애드 행동규범은 다음과 같다.
1. 나를 통해 회사가 평가된다. 항상 내가 회사의 대표라고 생각하자.
2. 내 마음을 먼저 열자.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이다.
3. 매사에 완벽을 기하자. 그것이 전문인의 자세다.
아울러 비전 실행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CD제도 연구팀, CI추진팀, 인재개발팀, 사무혁신추진팀 등 4개의 비전실천 실무팀을 구성하고, 비전 선포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광고회사에서 가장 중요하며 핵심이 되는 자산은 사람, 곧 인재라는 인식을 공유하여 향후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는 인재상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미래 사업전개와 사회환경에 대응하는 조직 여건으로부터 인재의 의미를 추출하고, 이를 토대로 ‘도전하는 창조인’, ‘앞서가는 문화인’, ‘실천하는 협동인’ 등의 인재상을 정립하고 이를 회사의 사훈으로 제정하였다. 아울러 인재개발 중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인재개발위원회의 활성화, 육성 면담제도의 시행, CD제 운영, 보직 순환제 실시 등이 추진되었고, 1992년부터 사내에 광고전문인 육성을 위한 LG애드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더불어 21세기를 향한 비전을 담은 새로운 CI를 확정하고 회사 창립 8주년이 되는 1992년 7월 1일부터 사용하였다. 새 CI는 국제화를 추구하는 기업 위상에 부응하여 영문 레터마크로 제작되었는데, 전문적인 종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를 통해 21세기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려는 강한 의지를 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No.1 크리에이티브 운동’의 빛나는 성과

제작 부문도 CD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크리에이티브 조직을 확대하는 등 No.1 크리에이티브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90년 클리오(Clio)에서 일화 맥콜이 파이널리스트를, 뉴욕페스티벌 TV 컴퓨터그래픽 부문에서는 LG카드 크레디피아가 파이널리스트에 선정되는 등 해외광고제에서의 수상이 이어졌다. 이어서 1993년에는 럭키금성그룹의 고객시리즈 그룹광고가 한국소비자단체연합회가 선정한 ‘제1회 소비자가 뽑은 좋은 광고상’의 으뜸상을 수상하였고, 광고학회가 선정하는 TV부문 ‘올해의 광고’로 금성사 Z블랙브라운관 투우편이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1993년 2월, LG애드가 제작한 레고코리아 TV광고가 대만과 일본에 수출되어 현지 방송을 통해 방영되었고, 나이키 에어맥스 광고가 홍콩에 수출되는 등 글로벌 기업들로부터도 크리에이티브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광고주 영입도 활발하게 이어지면서 레코코리아·스포츠조선·한국도자기·건영·김정문알로에·비바백화점·수도약품·폴리그램·질레트코리아·영창실업·한미약품·이랜드·베비라·쌍용그룹 등을 신규 광고주로 맞아들였다.


새로운 도전과 시련의 시기(1995~2002)

LG애드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기 위한 발걸음이 가속되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과거부터 유지해오던 일본의 덴츠, 미국의 BBDO 등과의 교류를 지속하는 한편, 1991년 동경지사를 시작으로 1995년 북경지사, 1996년 뉴욕지사, 1997년 두바이지사 등을 설립, 광고주의 해외 광고 마케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나섰다.

21세기를 향한 새 얼굴, ‘LG’ 탄생
그 중 1995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한 해였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혁신의 해’로 선포하면서 대외 경쟁력 강화를 위해 조직을 팀제도로 개편했다. 기획부문의 경우 팀을 세분화하고 내·외부 광고주를 혼합·조정하였으며, CR부문의 경우 팀을 세분화하고 제작담당 임원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한 세계 3대 광고제 중의 하나인 뉴욕페스티벌에서 본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모그룹인 럭키금성의 CI 작업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당시 럭키금성그룹은 자매사 간의 기업명을 통일하면서 시너지를 높이는 한편, 세계적인 기업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공통의 글로벌 스탠더드 기업명과 심벌의 제정이 필요했다. 이에 1994년 그룹 명칭 체제 개정에 따른 CI 추진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보다 강력하고 선명하며, 통합적이며 체계적인 CI 개발의 과제를 안고, 수개월의 조사와 수정을 거쳐 최종 확정된 것이 바로, ‘LG’라는 기업명과 ‘미래의 얼굴(The Face of the Future)’이라는 심벌이었다.
‘미래의 얼굴’은 세계·미래·젊음·인간·기술 등의 5가지 개념과 정서를 형상화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L’과 ‘G’를 둥근 원 속에 형상화시켜 무엇보다 인간이 LG경영의 중심에 있음을 상징하도록 했다. 이는 세계 어디서나 고객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LG인의 결의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눈은 목표지향성·집중성·미소를 의미하며, 우측의 여백은 비대칭으로 변화적응성 및 창조성을 상징하고 있다. 기본 색상인 ‘LG Red(Pantone 207C)’는 LG인의 정열적인 도전 의지, 인종을 초월한 세계에 대한 관심, 따뜻함과 친근함을 나타내며, ‘LG Gray(Pantone 430C)’는 기술력·신뢰감을 상징한다.
이어서 LG그룹의 새로운 CI 제정의 의의를 되새기고, 어린이들에게 미래 세계에 대한 꿈과 상상력을 길러주기 위해 ‘LG미래의 얼굴 그리기 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LG의 새 얼굴을 알리는 ‘사랑해요 LG’ TV캠페인을 전개했는데, 캠페인은 친근한 로고송과 더불어 소비자들의 높은 호응을 얻어 단기간에 LG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국내 광고로는 처음으로 1995년 뉴욕페스티벌에서 금성 아트비전 TV광고가 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광고시장 전면 개방 이후 국내 크리에이티브의 질적 향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렇듯 권위 있는 세계적인 국제광고제의 본상 수상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카스맥주 광고캠페인이 최고의 광고 효과를 거둔 작품에 대한 평가 부문으로 뉴욕페스티벌이 신설한 ‘제1회 AME 부문’에서 국내 업체로는 유일하게 은메달을 수상한 데 이어, LG전자 싱싱냉장고 지면광고가 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IMF 시련 조기 극복, 대통령 취임식 성공적 수행
1996년 8월에는 회사의 미래상을 재정립하고 이를 공유하기 위한 ‘도전2005’선포식을 가졌다. 그리고 2005년에 ‘국내 1위, 세계 10위권의 토털 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실현한다는 계획 아래 매출목표를 5조1,000억 원으로 설정, 국내 광고산업의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한편, 미주·중앙아시아·유럽·동남아·중국 등 5개 지역, 26개의 해외 네트워크를 구축해 해외광고사업을 확대하며, 멀티미디어·스포츠마케팅·스페이스디자인 등의 신규사업을 적극 펼치는 등 경영체질을 혁신적으로 강화해나가기로 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1997년 인력 운영의 효율성 제고, 크리에이티브력 향상을 목적으로 CM팀을 독립시키는 한편, ‘도약2005’의 실현을 위해 해외사업, 마케팅, 전략기획 부문을 강화하고, 아울러 신규사업을 위한 전략개발팀을 신설했다.
그러나 97년 말 IMF 구제금융 사태로 인해 국내 경제 및 사회 전분야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광고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동안 고성장을 거듭하던 광고시장이 마이너스 성장으로 주저앉은 가운데, 기업들의 연쇄부도 사태와 뒤따른 경기침체는 회사의 단기 경영전략은 물론이고 중장기전략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이에 어려움을 조기에 돌파하기 위해 책임경영제도의 정착과 불황 극복을 위한 전사적인 노력이 펼쳐졌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1998년 ‘소비자가 뽑은 좋은 광고상’에서 LG 019 PCS ‘자장가’편이, 전년도의 영창피아노 ‘평화의 소리’편에 이어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면서, LG애드의 차별화된 크리에이티브 능력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어 연말에는 LG 019 PCS ‘아빠’편이 ‘대한민국광고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또 부산에 미래의 과학기술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청소년과학관을 개관하는 한편, 민간기업 최초로 대통령 취임식 행사를 맡아 진행하는 등 괄목할 만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은 IMF라는 경제적인 상황을 고려해 행사의 화려함보다는 정권 교체의 상징성과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희망의 새시대를 향한 국민적인 합일점을 이끌어 내는 데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러한 취임식의 성공적인 수행은 그 동안 정부나 지자체들이 독자적으로 수행해오던 행사들을 광고회사의 사업영역으로 확대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대통령이 직접 출연,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고 관광객 유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회사가 제작한 CF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를 통해 방영되면서 높은 호응을 얻어, IMF로 다소 주춤했던 국가이미지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1999년은 연초부터 IMF 구제금융의 어려움을 잊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좋은 소식들이 잇따랐다. 뉴욕페스티벌에서 LG정보통신의 LG싸이언 지면광고 ‘귀걸이’편이 은상을 수상하고, LG브랜드의 ‘사막’편이 동상을 수상하는 등 연초부터 이어진 해외 광고제 수상은 그 동안의 어려움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쾌거였다. 또한 ‘사막’편은 ‘소비자가 뽑은 광고상’ 대상을 수상, 3년 연속 대상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특히 뉴밀레니엄의 원년을 앞둔 시점에서 회사의 경영을 보다 투명하게 하는 한편, 증권시장을 통해 자본을 조달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증권거래소에 신규 상장했는데, 이는 광고산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넓히고 우리나라 광고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첨단 전문 시스템의 독자적 개발
이어 1987년 LG마포빌딩 입주 후 12년 동안의 ‘마포시대’를 마감하고 LG트윈타워 빌딩으로 이전, ‘여의도 시대’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터전에서의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였다.
연말에는 ‘제27회 광고의 날’을 맞아 이인호 사장이 국내 광고의 질적 향상 및 국제 경쟁력 제고, 민간기업 최초의 대통령 취임식 행사 진행, 대통령을 모델로 한 ‘웰컴 투 코리아’ 광고가 관광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였다.
2000년 들어 LG애드는 ‘내가 한다’는 슬로건 하에 ‘기업가치의 혁신, 사업별 핵심역량 배가, 성과주의 문화의 정착’을 경영방침으로 내세우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한 노력에 본격 착수했다.
우선 사내 시스템 및 광고 관련 전문 시스템의 체계적인 정비와 구축을 통해 회사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광고주 서비스를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마케팅 부분의 강화를 위해 독자적인 브랜드진단 시스템인 ‘LG-BreMS’를 구축하는 한편, 2001년에는 통합적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을 전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광고주의 시장상황 분석 및 전략수립을 목적으로 ‘브랜드전략연구소’를 설립했다. 이어 국내 최초로 네티즌의 행동양식을 조사하고, 그 탄생과 진화에 관한 보고서인 ‘NPR(Netizen Profile Research)’을 발간하면서 소비자 연구 분야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또 광고회사 특성에 맞는 지식경영 제도 정착 등을 위해 네비게이터 형식의 새로운 지식경영시스템인 ‘알라딘(Aladin : Advaced LG Ad Dynamic Intelligence Navigator)’을 오픈하면서 사내의 지식검색 및 노하우를 공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
미디어 부문은 기존 4대 매체 이외 케이블·위성방송·인터넷 등의 등장으로 더욱 복잡해진 미디어 환경에 대처하고, 나아가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국형 미디어 컨설팅 시스템 ‘M·POPS(Media Planning, Optimizing and Purchasing System)’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광고주 서비스에 적극 나섰다.
또 광고주의 해외진출에 따른 광고·마케팅 업무를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중남미 지역인 멕시코와 파나마에 지사를 잇따라 개설하는 등 잠시 주춤했던 글로벌 네트워크 확대를 재개했다.


월드컵 프로젝트의 성공적 수행

국가적 대형행사에 대한 LG애드의 역량과 경험은 월드컵 관련 행사에서도 그 빛을 발해, 2001년 12월 부산 BEXCO에서 전세계 50여 개국에 생방송되는 가운데 역사적인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본선 조 추첨식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는 세계 전역에서 23번에 걸쳐 진행되었던 기존의 월드컵 조 추첨식과는 뚜렷하게 차별화된, 한국의 문화를 포함한 전통과 현대, 과학과 예술이 조화된 다양한 문화행사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진행되어 전세계의 격찬을 받았다. 특히 FIFA에서는 그 동안 ‘축구 이상의 이벤트는 없다’는 공식입장을 지켜왔지만, 이 날의 조 추첨식을 직접 지켜본 제프 블레터 FIFA회장 등 관계자들 역시 찬사를 아끼지 않을 만큼 성공적인 행사로 평가받아 또 다른 주목을 끌었다. 더불어 조 추첨식 이후 그 동안 부진하던 월드컵 입장권 예매가 활발하게 재개되어 이 행사는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재탄생과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2002~2004)

1997년에 몰아친 IMF 구제금융의 여파는 새로운 세기를 넘어서면서도 계속 이어져, 1999년 이후 차츰 경제지표나 여건이 나아지고 있기는 했지만 체감경기는 예전만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LG애드는 어려운 외부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스스로 마련하자는 의미로 ‘새롭게 하자! New Mind, New Way!’를 경영 슬로건으로 정하고 변화를 다짐하며 2002년을 시작했다.
‘새롭게 하자’에는, 최고라는 궁극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현재 처해 있는 위치를 냉철히 점검해보고, 임직원 모두 마음과 행동, 그리고 조직문화를 더욱 새롭게 만들어나가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의지를 다지기 위해 천안 상록리조트에서 1박 2일의 일정으로 ‘목표달성결의대회’를 진행하는 한편, ‘한마음 걷기대회’행사를 통해 다시 한번 굳은 결의를 다지는 등 다양한 행사가 이어졌다.

내실과 외형의 동반 성장
이러한 의지와 실천적 노력은 구체적 성과로 이어져, 영업부문에서 LG텔레콤·한빛은행·쌍용건설 등 대형광고주를 영입하면서 1분기에만 631억 원 규모의 신규 실적을 기록했다.
제작부문에서도 LG전자의 ‘생명시리즈’가 ‘제10회 소비자가 뽑은 좋은 광고상’ 인쇄부문 대상을 수상하고, LG전선의 기업PR 광고와 나이키의 월드컵 캠페인이 각각 지면과 잡지부문의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어 LG 브랜드의 기업PR 광고가 광고학회 선정 ‘올해의 광고상’으로 뽑히는 기쁨도 누렸다.
LG애드는 또 광고회사의 핵심 역량 중 하나인 크리에이티브 부문의 사기 진작과 능력 고취를 위해 CD들의 안식월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제작부문이 아닌 다른 부문의 임직원들의 광고에 대한 안목을 증진시키고자 인터넷 상에서 우리의 제작물을 평가하는 ‘사이버 CRB’를 신설해 시행하였다.

프로모션 부문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경의선 남측 최북단 역인 도라산 역을 방문하는 국가적인 행사를 진행하는 한편,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본선 조 추첨식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월드컵 행사를 수행했다. 먼저 월드컵이 개최되기 직전 LG전자가 후원하는 한국 국가대표팀과 프랑스 대표팀의 평가전 행사를 시작으로, 월드컵 경기장의 각종 환경장식물 프로젝트, 월드컵 개최 도시의 붐 조성을 위한 행사인 대전시 월드컵 문화행사, 서울시 월드컵 전야제, 서울 여의도 플라자 등 관련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또한 서울·대구·부산 등의 지하철 역사에 전세계 축구스타 23명의 대형 이미지를 래핑(Wrapping)하는 신(新)기법으로 나이키의 테마 스테이션을 연출, 많은 화제를 모았다.
한편, 기업가치를 외부에 알리기 위한 노력도 지속됐다. 1999년 회사를 상장한 이후 처음으로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를 초청, 실적과 회사의 경영방침을 설명하는 공개 IR설명회를 개최하고,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열린 ‘한국의 날’ 행사에 참가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외 IR활동에 착수한 것이다.


WPP의 일원으로 새 출발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마감하는 2002년 연말, LG애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모그룹인 LG가 2003년 통합지주회사 출범과 함께 화학 및 전자·통신 등 주력 핵심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LG애드의 지분 28.5%를 세계 최대의 광고그룹인 WPP에 넘겨주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경영환경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 WPP는 LG애드의 발행주식 중 최대 주주로부터 28.5%의 지분을 포함한 총 35.8%를 취득하고, 12월 4일 이 내용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LG애드는 기존에 LG애드가 보유하고 있는 국내 영업기반 및 크리에이티브력과 WPP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결합하여 최대한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 브랜드 인지도를 강화하면서 수익구조를 다양화하여 보다 경쟁력 있는 회사로 거듭 태어나게 된 것이다. WPP그룹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의 전부문을 통합해 다국적 서비스를 하는 세계 최대의 글로벌 광고·홍보그룹으로,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두고 산하에 JWT·오길비 앤 매더(Ogilvy & Mather)·영 앤 루비컴(Young & Rubicam) 등 세계 굴지의 광고회사들을 두고 있다.
LG애드는 2003년 이렇게 WPP의 일원으로 새 출발하면서 회사의 경영 슬로건을 ‘Re-Birth LG Ad’로 정하고, 경영과 제도 등의 외적인 변화뿐 아니라 의식·생각·각오도 변화, 업그레이드할 것을 결의했다.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침으로 ‘파트너십(Partnership)’·‘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노베이션(Innovation)’을 천명했다.
이러한 결의 속에 LG애드는 한층 수준 높은 서비스와 열정으로 광고주와의 파트너십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WPP의 해외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차별화된 경쟁력을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세계적 수준의 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고객서비스 강화, 크리에이티브 향상, 브랜드 관리의 선진화 등 내부역량 강화를 꾀하면서, 임직원 모두가 스스로 글로벌 스탠더드 인재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글로벌라이제이션’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직과 기업의 문화의 혁신을 이루어내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에 WPP의 CEO인 Sir Martin Sorrell이 직접 한국을 방문하고, LG애드가 WPP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Sir Matrin Sorrell은 향후 아시아 지역이 세계 광고시장 성장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특히 한국에서는 LG애드가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와 포부를 밝혔다.
Sir Martin Sorrell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주요 광고단체장들과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 기자들과의 프레스 컨퍼런스(Press Conference)를 통해 한국 광고시장의 발전에 대한 WPP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또 LG애드의 광고주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갖고, LG애드가 WPP의 선진 노하우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함께하는 일원임을 천명했다.
아울러 WPP 관련 인사들도 잇따라 내한해 우리나라 광고시장에 대한 이해를 넓히면서 사업협력의 방안을 모색했다. 오길비 아시아퍼시픽의 교육 컨설턴트였던 Ian Strachan은 3월 초 회사를 방문해 국내외 교육시스템 전반을 리뷰하고, ‘Block-Bursting: 대행사와 광고주 사이에 상존하는 장벽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의 고찰’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실시했다. 이어 오길비 앤 매더(O&M) 아시아-퍼시픽의 마일즈 영 회장은 기획팀장과 CD들을 대상으로 ‘좋은 광고회사가 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를 주제로 특강을 가졌고, WPP 계열의 세계적인 미디어 에이전시인 MindShare Worldwide의 Dominic Proctor COO 일행이 LG애드 미디어플래닝팀과 함께 우리나라 미디어 시장 현황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어서 6월에는 회사의 기업경영 철학 및 향후 발전방향과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공유하며 새 출발을 다짐하는 ‘Re-Birth LG Ad’ 행사를 창사 이래 최대 규모로 1박 2일간 제주도에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에서 LG애드는 앞으로의 경영철학을 ‘고객과 브랜드의 관계를 찾아내 이어주는 심마니가 되는 것’이라고 정하고, 고객과 브랜드 사이의 이러한 ‘연(緣)’을 찾아내고 승화시키는 것이 회사의 역할이자 사명(使命)이라는 내용의 비전 선언문(Vision Statement)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고객과 브랜드 사이에 숨어있는 연을 찾아내는 심마니입니다.
우리는 고객과 브랜드의 관계를 연으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사입니다.’

한편, 7월 1일자로 이인호(李仁浩) 대표이사 사장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 발령하는 한편, 광고 부문(Advertising Communication Division)과 프로모션 부문(Specialist Communication Division)의 양대 영업 부문 운영을 통한 책임 경영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또 같은 날 창립 19주년을 맞이해 기념식을 갖고 새로 제정된 CI를 발표했다.
LG애드의 새 CI는 LG 고유의 빨간색을 그대로 사용해 그 동안 형성된 강력한 시각적 아이덴티티(Identity)는 유지하면서도, 새로움과 차별성을 더하기 위해 기존의 원형을 탈피, 사각형을 활용해 개발된 것이 특징이다. CI의 중심을 이루는 사각형은 대외적으로 최고의 크리에이티브와 커뮤니케이션 솔루션을 제공하고 고객 브랜드의 성공을 다짐하는 의미를, 대내적으로는 임직원의 비전을 가꾸어 나가고 안정된 텃밭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세계적인 광고회사로의 도약을 위한 WPP와의 교류도 계속 진행되었다. 이에 먼저,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3일간 서울에서 WPP의 대표적 광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LG애드-WPP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세미나에는 오길비의 산 증인인 오길비 앤 매더(O&M) 월드와이드의 CEO인 쉘리 라자러스 회장을 비롯해, ‘Got Milk?’캠페인 등을 주도한 광고전략의 대가 존 스틸 WPP 자문역,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크리에이터인 탐 카이 멩 O&M 아시아-퍼시픽 공동 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LG애드 임직원을 대상으로 총 11가지의 특강·클리닉·워크숍 등을 통해 기획(AE)·제작(CR)·프로모션·마케팅 등 각 분야별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강연을 진행했는데, 이와 함께 소그룹별 상담강의도 병행하면서 업무 스킬에 대한 진단과 노하우 전수, 사업전략과 비전에 대한 조언 등으로 국내 광고의 질적 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2003년 새로운 변화의 출발점에 선 LG애드는, 1998년 민간기업 최초로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행사를 진행한 데 이어 제16대 대통령 취임식행사를 총괄 기획, 수행하면서 국가적인 대형 행사를 광고회사의 사업영역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LG애드의 이러한 역량은 대외적으로도 크게 인정받아, 나이키 코리아의 2002 월드컵 캠페인은 2002년 전세계 나이키 광고대행사 가운데 최고의 크리에이티브로 뽑혀 대상을 수상했다. 이어 2003 칸 국제광고제에서 옥외광고 부문 아시아 최초로 영예의 은사자상을 수상했고, 2004년 뉴욕페스티벌 AME(Advertising and Marketing Effectiveness)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국내 최초 광고그룹으로서의 새로운 도전
그리고 2004년 들어 LG애드는 ‘Go for Yeon’을 슬로건으로, 광고주 만족도 혁신, 미래성장 기반 구축을 위한 인프라 강화, 신비전 ‘연(緣)’의 실행을 골자로 하는 경영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광고 제작물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고 산하 스태프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기존 광고제작 부문 산하 4개 CD그룹을 분리하여 팀 단위 조직으로 변경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아울러 크리에이티브력 강화를 위해 CCO(Chief Creative Officer)를 신설하고 이재철 부사장을 영입했다.
또 기존 뉴욕지사를 법인으로 승격시킨 것과 아울러 해외시장 진출 및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는 광고주들의 해외 마케팅 지원 능력을 높이기 위해 추가 법인 설립 및 지사 개설 계획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WTL은 LG애드 뉴욕지사와 미국 내 WPP의 광고인력 및 네트워크가 결합한 형태로서, 이를 통해 미주지역에 진출한 광고주의 광고 마케팅 업무를 지원하고 해당 지역의 영업을 대폭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6월에는 이사회를 개최하고 국내 최초의 광고그룹으로 도약한다는 구상 하에 기업구조조정 변경안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9월 1일부로 회사를 순수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리하게 되며, 광고영업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사업회사에 LG애드 사명을 이전할 계획이다.
이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회사의 미래상과 관련해, 기존 하우스 에이전시 체제와 한 업종, 한 광고주만을 보유할 수 있는 현 광고회사 구조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 이를 돌파하기 위한 결단이다. 이에 따라 외국의 광고그룹처럼 광고기획 및 제작은 각 사업회사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광고주를 그룹 내에 유치해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러한 LG애드의 광고그룹화는 기존 국내에 진출해 있는 WPP 계열사들과는 별개로 회사의 중장기 성장 계획 수립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2004년 창립 20주년을 맞아 LG애드는 광고그룹으로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고 나섰다. 지난 20년 간 수많은 성공 캠페인을 창출해내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광고회사로 자리 잡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 글로벌 광고회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힘찬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