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곳에 있다
"이끼"라는 작품을 매울 인물과 사건을 만들어야 했다. 작가마다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 서랍'을 열었다. 그곳은 메모장이며 아이디어를 도울 파일이며 사진이며 낙서가 가득한 곳이다. 마치 시골집 다락 같은 공간.
만화가란 직업은 대중의 눈높이와 항상 함께해야 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그들보다 좀 더 어려우면 이해받기 힘들고, 좀 더 쉬우면 무시당한다. 하지만 독자는 언제나 그렇듯 '익숙하게 다른 것'을 탐하는 사람들이니 쉽지 않게 '익숙한 것을 풀어내며' 어렵지 않게 '다름을 보여야'한다.
커피숍에서 음미하는 '악마의 사전'
개인적으로 몸과 마음이 편했을 때 상상력이 제대로 발휘된 적이 없다. 언제나 마감일을 목매는 기분으로 기다리며 하루하루 피를 말린 후에야 슬그머니 아이디어는 고개를 내밀었었다. 그래서 이제는 피를 말리는 일이 오히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주술적 과정의 하나로 정착한 기분이다. 말하자면 마감이 코앞인데 한가하게 커피숍에서 사전을 읽거나 써야할 이야기와 전혀 다른 소설을 읽거나 하는 행위 말이다.
나는 사전을 좋아한다. 내 화실에만 사전이 약 스무 권 정도 있다. 국어사전과 외국어 사전 몇 종류를 포함한, 용어에 관한 거의 모든 용례가 들어있는 '문장백과대사전', 욕에 관한 모든 것이 들어있는 '욕설백과대사전', '귀신백과사전' '악마의 사전', '철학사전', '경제용어사전' 등등 종류가 다양하다. 이 사전 중 하나를 들고 커피숍에 앉아 찬찬히 들춰보는 거다.
참고로 내 만화 중 <야후YAHOO>란 만화는 영어사전의 도움을 받았다. 그전에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었지만 4장 '후이넘의 세계'편에서도 내게 각성되지 못한 용어가 사전을 통해 '짐승 같은 인간'이란 뜻으로 훅 들어 온 것이다.
<악마의 사전> <귀신백과사전>
서랍을 열다
새 작품을 기획할 때 나는 제목을 제일 먼저 고민한다. 모든 일의 시작은 제목부터다. 어느 한낮 명동 커피숍에서 편집자와 마주했다. 새로 창간되는 유료웹진 작가 섭외차 나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쎈' 작품을 원했고 나는 직관적으로 '스릴러'라고 답했다. 그는 좋다고 했고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이끼>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앞뒤 없이 그냥 '이끼'였고 스릴러는 '이끼'여야 했다.
그리고 '이끼'라는 작품을 매울 인물과 사건을 만들어야 했다. 작가마다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 서랍'을 열었다. 그곳은 메모장이며 아이디어를 도울 파일이며 사진이며 낙서가 가득한 곳이다. 마치 시골집 다락 같은 공간. 누구는 실재 서랍에, 누구는 컴퓨터 안에, 누구는 노트에 담아두지만 대개 이런 공간은 하나쯤 갖고들 있다.
그곳에서 내 눈길을 끈 인물 파일이 하나 들어왔다. 한 유머사이트에서 본 인물이 자기 개인적인 사연을 연재한 글이다. 그 글들을 갈무리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물이 이끼의 모델이 되었다. 단, 그가 쓴 어떤 내용도 만화에선 그대로 다루지 않겠다는 내 규칙이 있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경험하는 그 후의 이야기'를 포인트로 삼았다. 인물파일 덕에 나는 누구보다 내 주인공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고 그를 풍부하게 바라다볼 수 있었다.
윤태호 작 <이끼>
어쩌다 찾아오는 아이디어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상상력은 어쩌다 얻어걸리는 복권이 아니다. 평소에 자기만의 서랍(준비)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마치 심지와 연결된 화약처럼 때(불꽃)가 되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불꽃을 기다리며 화약을 모아두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내 화실에는 정말 종이 다른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는데, 책만 해도 어떤 단일 코드가 없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책들이 내게 자양분이 된다는 것은 변함없다.
최근엔 챙겨봐야 할 책들이 더 늘었다. 아이를 키우며 사 모은 어린이 책과 어린이 잡지다. 어린이 그림책은 다양한 그림작가들의 스타일을 볼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 나 같은 경우 상상력이란 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함께여야 하기 때문에 내 스타일과 다른 그림을 목격하고 경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아이가 보는 잡지. 과학잡지와 어린이 오락잡지가 있는데 그 중 과학잡지는 내 수준에 딱이다.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주니 내 상식과 결합되면 시너지가 대단한 것이다. 그때 읽은 내용들도 차곡차곡 내 서랍에 저장된다.
나는 인터넷을 하거나 컴퓨터 작업을 할 때 항상 익스플로러창 옆에 메모장을 띄워 놓는다. 그때 그때 궁금했던 단어들을 적고 그 뜻을 검색해서 찾아보고 복사해 붙여놓는다. 그렇게 하루의 메모장이 완성되고 그 날짜로 서랍에 저장된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 서랍을 열어 그 메모장들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생각을 단련할 수 있다.
준비하고 계획하라. 어쩌다 찾아오는 아이디어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수집하고 내 것으로 탐욕스레 저장하라. 그리고 자주 꺼내보라.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곳에 있다.
윤태호
만화가 | taio69@yahoo.co.kr
1993년 <비상착륙>으로 데뷔한 후 <혼자 사는 남편> <연씨별곡> <야후> 등을 발표했다.
포털사이트에 연재한 <이끼>는 매회 수십만 명이 읽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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