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0 : 문화적 영감 - 뫼비우스의 띠, 그 모호함과 예술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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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적 영감
뫼비우스의 띠, 그 모호함과 예술

 

Moibius의 새로운 시도는 궁극적인 사고의 틀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이러한 유연한 사고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적인 발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기도 하다.

 

 

‘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절망을 주기 쉬운 말이지만, ‘끝이 없다는 것’ 역시 희망의 상징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대개 끝이라는 것은 죽음 혹은 소멸과 연결돼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하나의 일이 끝맺음을 맺었다는 것은 결과물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다시는 그 일에 관여해 다른 방식으로 일을 진행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에 ‘끝’은 아쉬움과 후회를 동반한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끝이 없다는 것’ 역시 우리에게 버거움과 고통을 준다.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방랑자처럼, 목표(끝)를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도 그 걸음의 속도만큼 그 목표가 후퇴한다면 우리는 결국 좌절하고 절망하고 말 것이다.

 


내외부의 , 끝의 없음
‘뫼비우스의 띠’는 2차원의 도형으로 긴 직사각형을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여 만든 것이다. 그것에는 앞과 뒤가 없으며, 그 위를 아무리 걸어도 끝을 만날 수가 없다. 한 마리의 개미가 그 위를 따라 걷는다면 한 바퀴를 돌 때 출발지의 뒷면에 도달하고, 두 바퀴를 돌면 처음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계속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죽음에 도달하지 않는 이상 끝을 만날 수가 없다. 이처럼 뫼비우스의 띠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우리는 누구나 쉽게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수 있다-이지만, ‘끝’이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시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성은 신화적 혹은 마술적 요소로도 여겨지며, 간혹 허무주의에 이르도록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치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 태어나 하데스의 저주로 영원히 다시 제자리로 떨어지는 바위를 끌어올려야 했던 시지프스의 절망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비로운 띠는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주기도 했다.
수학에서 무한대는 뫼비우스의 띠를 응용한 ∞로 표시되며, 기하학과 천문학에서 새로운 이론들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이는 인문학적으로도 해석되어 극단적인 찬성과 반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뫼비우스의 띠에는 외부도 내부도 없으며, 양쪽 면은 한 방향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正)은 또 다른 반(反)이 될 수 있으며, 반(反)은 또 다른 정(正)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됐다. 이는 흥미롭게도 현대 인문학이 추구하는 경직된 사고체계의 파괴, 유연한 사고방식의 도입, 진리의 다양성, 시각의 다수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인식론적 이분법에 대한 극복의 근거를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내용은 동양철학의 대표격인 <도덕경>에도 등장하는데,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며……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무와 유)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라는 구절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경계의 파괴, 구분의 모호함
그렇다면 이렇듯 오묘한 현실적 존재인 뫼비우스의 띠가 반영돼 있는 예술작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이름 그대로를 제목으로 차용한 조세희의 단편 <뫼비우스의 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단편은 조세희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수록된 12편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으로, 그 안에는 두가지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퇴직을 앞둔 수학교사가 학생들에게 던지는. “굴뚝청소를 하는 두 아이 중 얼굴이 지저분한 아이와 깨끗한 아이가 있다.
그렇다면 누가 세수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아이들은 “얼굴이 지저분한 아이”라고 대답했고, 교사는 “그렇지 않다. 얼굴이 지저분한 아이는 깨끗한 아이를 보면서 자신의 얼굴도 깨끗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굴뚝청소를 하는 아이는 얼굴이 깨끗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 숨어있는 ‘뫼비우스의 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더러움’과 ‘깨끗함’은 결국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사기를 당한 앉은뱅이와 꼽추의 이야기이다. 복수를 하는 앉은뱅이의 잔인함에 꼽추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 역시 이 사건의 가해자가 된다. 이 내용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처절한 배신을 당한 약자(피해자)들이 응징을 가하면서 가해자가 될 때 과연 그들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사건 속에서 궁극적인 가해자는 이들을 이러한 현상 속에 가두도록 한 우리의 사회임을 알려준다. 결국 이 세계는 궁극적 가해자도 피해자도 허락하지 않으며, 누구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실제로 이와 같은 사건들을 신문이나 뉴스에서 종종 접하게 된다.
젊은 미술인 김용관의 작업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목격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공간을 다시점으로 접근해 현실의 공간에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요소를 삽입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가 이러한 작업에 적용한 도구가 바로 뫼비우스의 띠였다. 김용관에게 공간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지금 이 세계이며, 우리의 포지션과 위치를 규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며, 우리를 가두고 지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뫼비우스의 띠를 이용해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네덜란드의 판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에셔가 작품에 투사한 뫼비우스의 띠에서 현실이 부조리와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봤음을 고백한 바 있다.
결국 부조리와 모순은 구분지음과 경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며, 이러한 경계를 허물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구분과 경계는 사라질 수 없음을. 그러므로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와 같은 철학자는 선험적으로 경계가 설정되어 감성의 분할 상태로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화’에 대해 설명하고, 피지배자들이 무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 바 있다.

 


유연한 사고, 창의적 발상의 매개체
유명 건축가 벤 반 버켈(Ben Van Berkel)이 UN 스튜디오의 지원으로 작업한 네덜란드 헷 구이에 위치한 ‘뫼비우스하우스’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건축물의 공간은 시작과 끝이 없으며, 그로 인해 공간 사이의 경계선은 매우 불분명하다. 이는 시간의 단위로 분절되어온 ‘시간’을 일상에서 연속되는 실제적 시간 개념으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에서 작업된 것으로, 버컬은 이 공간 안에서 연속되는 일상의 시간을 뫼비우스의 띠와 교차시켰다.
그는 갤러리아 압구정점의 리뉴얼을 맡으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는데, 혁신적이면서 창의적인 작업으로 대중과 소통하면서 사회적 변화에 반응하는, 이른바 새로운 건축가의 역할을 제시하는 예술인이다. 그는 주변 지역의 여건과 상태 역시 작품에 반영함으로써 지역에 공헌하는 건축을 추구하고 있다.
지금 이야기한 작가와 작품들로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에게 뫼비우스의 띠는 단절과 분할을 극복하는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갈등과 사건은 구분지음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새로운 경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분 없는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경우 허물어진 경계는 뒤바뀐 헤게모니가 적용되면서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온전한 정(正)도 온전한 반(反)도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다. 19세기 초중반에 독일에서 활동하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우구스트 뫼비우스(August Ferdinand Moibius)의 새로운 시도는 이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궁극적인 사고의 틀을 바꿀 수 있는 계기 역시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연한 사고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적인 발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기도 하다.

 

 

김지혜

독립 큐레이터 | from.peru@gmail.com
홍익대 미학과 석사과정 이수, 숙명여대 미술사학과 석사과정 수료. 현재 홍익대 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큐레이터로 다양한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매체에 대중과 아동을 위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