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2 : WiseBell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WiseBell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급기야 큰엄마의 양미간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옴팡눈이 더 옴팡해 보였다. 그 성미에 상황이 고약한 지경으로 흐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아니 시간 없는데 빨리 빨리 아무 양말이나 신고 나올 것이지, 무슨 놈의 양말 타령을 하는지….” 늦잠 잔 것도 분통터질 노릇인데, 큰아버지의 어이없는 행동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큰엄마의 입이 속사포처럼 움직이는 것을 멀찍이서 보며 우리는 부랴부랴 문 밖을 나섰다.
시외버스라 시간을 놓치면 낭패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믿을 건 두 다리와 약간의 운 정도….
하지만 촌각을 다투며 달려온 우리에게, 버스는 뒷모습만을 남긴 채 소실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허겁지겁 도착한 큰아버지의 멋쩍은 웃음을 원망하며 우리는 다음 버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큰집은 춘천에 있었다. 방학 때면 가끔 놀러가곤 했었는데, 그날은 식구들끼리 더위도 씻을 겸 등선폭포로 소풍을 가려던 참이었다. 어쨌든 큰아버지의 게으름 때문에, 아니 어쩌면 그 놈의 양말 한 짝 때문에 우리는 그 후 기막힌 경험을 하게 됐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올라 탄 버스가 의암댐을 지날 무렵이었다.
댐 아래로 일단의 사람들이 분주히 몰려다니고 경찰차에 앰뷸런스까지, 어린 나이에도 뭔가 큰일이 일어났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타려고 했던 바로 앞 버스가 의암댐으로 추락한 것이었다. 그날 일터에 나가 있던 나의 사촌형 말에 따르면 눈물이 마를 새도 없이 달려와 미친 사람처럼 시신들 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는데 도대체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큰아버지의 죄는 돌연 영웅적 행동으로 찬사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큰아버지의 그 양말을 액자에 넣고 가보로 길이길이 기리는 일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장난의 운명인지 나의 염세성의 많은 부분은 그날을 모태로 하고 있다. 뻐꾸기가 어느 둥지에 알을 낳을지 누가 알랴. 큰아버지가 평소대로만 일어났더라면 우리 모두는 예정대로 버스를 탔을 것이고, 그 후에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영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우연성은 삶의 아이러니다. 내가 돌을 발로 찼으니 돌이 튕겨져나감은 분명한 인과이나 때마침 지나가던 트럭이 그 돌을 피하려다 전신주를 들이받고, 그로 인해 일대 정전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결과들과 그 결과들로 인해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우리는 직선적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그 과정 속에 또 다른 우연성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이미 설명의 한계를 넘어선다. 짐짓 눈을 감은 채 운명이라는 말로 정리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우연성 혹은 좀 더 에피쿠르스적으로 말하면 클리나멘으로 일어나는 분자들의 좌충우돌은 어쩌면 크리에이티브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관성에서 튕겨져 나가고 싶은 욕망, 나는 그 일탈의 상상들이 무계획적으로 충돌하는 시간이 즐겁다.


나는 상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현종
CCO (Chief Creative Officer) | jjongcd@hsad.co.kr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