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06 : 광고세상 보기 - 광고, 환상의 세계로 통하는 문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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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환상의 세계로 통하는 문
 
 
 광고세상 보기
 
송 형 석 |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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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단상

밤 10시 50분. 광고담당 기자인 S씨는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다. 격무에 술까지 한잔 걸친 터라 피곤의 강도가 평소의 곱절이다. 대문을 밀고 들어와 가까스로 소파에 몸을 던지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TV 리모컨. 그는 습관처럼 리모컨 스위치를 누른다. TV에는 한창 광고가 방영되고 있다. S씨는 취중에도 자신이 광고기자란 사실을 깨닫고 눈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화면 속에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형형색색의 미남미녀들이 제품을 알리고 있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광고는 L카드사의 신용카드 광고. 이영애는 친구인지 연인인지 헷갈리는(연인이라고 우기는 기자에게 홍보 담당자는 친구가 틀림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배용준과 볼링을 한다. 스트라이크.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하이파이브. S씨는 며칠 전 백화점 홍보 담당자와 했던 내기 볼링을 떠올린다. 생각해보니 한번도 스트라이크를 친 적이 없는 것 같다. 장면은 금세 캔커피 광고로 바뀐다. 신하균이 이름 모를 여자 모델과 춤을 추고 있다. 여자모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 파트너를 번쩍 들어 자신의 발 위에 올려놓는 신하균. 모델들은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애인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S씨는 속이 살살 뒤틀린다.
S씨는 애써 우울함을 털어버린다. ‘그래, 내일부터는 광고처럼 멋지게 사는 거야. 그까짓 것쯤 나도 할 수 있어.’ 광고의 장면들은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천천히 S씨에게 무의식으로 흡수된다. 광고를 보고 자다가 연예인 꿈을 꾸는 것이 즐거운 S씨. 그는 오늘도 광고와 함께 하루를 마감한다.
S씨는 사실 광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초등학교 때 만화영화를 보려고 TV 앞에 앉았던 잠깐의 시절을 제외하면 도무지 광고와 친했던 기억이 없다. 도대체 얼마나 광고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지는 광고를 담당한 후 한 달간의 그의 생활을 보면 알 수 있다. S씨는 거의 한 달 동안 ‘TV 죽순이’인 여동생의 얘기를 듣고 기사를 썼다. 별로 아는 광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몇몇 광고회사 직원들은 집요하게 여동생의 전화번호를 묻기도 했다. 그런데 광고에 대해 익숙해지면서 S씨도 점차 광고 매니아가 되어갔다.
 
꿈의 원천!
하지만 그가 쓰는 기사를 보면 그의 광고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고는 기업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기업이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임은 삼척 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S씨는 좀처럼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문화 코드가 잘 나타난 재미 있는 광고를 유달리 좋아한다. 반면 상업적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재미 없는 광고에는 영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기사를 왜 안 쓰냐”고 물으면 “재미가 없어서”라는 대답을 내놓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광고는 좋은데 무슨 제품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혹평을 듣고 있는 광고들이 기사의 주요 소재가 된다.
기사 전개방식에도 문제가 많다. 중요한 업계 이야기는 쏙 빠지고 광고의 줄거리가 시시콜콜한 것까지 묘사돼 있다. 그래서 그의 기사는 TV프로그램 옆에 나오는 방송프로그램 안내 기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온 광고의 경우다. S씨는 이 점에 대해 ‘노총각 기자라 그렇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S씨가 자신의 스타일에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광고제작이 꿈인 대학생들과 만난 이후다. 후배의 남자친구인 A씨도 그 중의 하나. A씨는 “광고는 가장 압축적으로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장르”라며 “짧으면서도 강렬한 것이 마치 미녀와의 키스” 같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이에 S씨는 광고제작은 예술이 아니라고, 결국은 광고주의 입맛에 맞는 광고를 만들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해주려다 꾹 참았다고 한다. 자기가 광고를 좋아하는 이유도 A씨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란다.
A씨와 만난 이후 S씨는 자신이 왜 광고를 좋아하게 됐는가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 질문의 답을 말해준 것은 다름 아닌 광고였다. 다음은 그가 말해 준 카드 광고의 줄거리이다.
‘김정은이 남자친구에 줄 선물을 고르려고 쇼윈도 앞을 서성인다. 하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이기만 하는데, 그 때 어디에선가 ‘이뤄질거예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등장하는 매장 점원 윤종신. 그는 김정은이 사려는 물건 앞에 ‘30% 할인판매’라고 씌여진 포스터를 붙인다. 적은 돈으로 선물을 살 수 있게 된 김정은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S씨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유레카!’ 라고 외쳤다고 한다. 광고는 그에게 꿈을 꾸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어른이 된 S씨에게도 가끔은 O.헨리의 단편을 읽을 때 느꼈을 법한 ‘재기 발랄한’ 즐거움이 필요했고, S씨는 지루한 광고를 봐주면서 그 정도의 이득은 누려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의 궤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여인을 사랑함에 있어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그녀에게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면 된다.’
S씨는 아무리 광고가 불필요한 상품 소비를 부추기는 악마의 소리라고 해도 보는 사람만 그렇게 안 느끼면 그만이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광고 속의 대리만족은 불쌍한 현대인의 자기보상에 불과하다’는 나의 독설을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미리 우물에 강력한 독을 친 것을 보면 말이다.
 
공유는 하지만 소통할 수 없는 환상을 광고로 만든다면…
‘사람들의 잠재된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광고가 궁극적으로 마케팅 효과가 있다.’
S씨는 요즘 유행하는 티저광고를 예로 들면서 계속 열변을 이어간다. 한 예로 이동통신 광고에 많이 활용된 티저광고는 상품과 광고의 철저한 무연성(無緣性)이 마케팅의 핵심이었단다. 제품 홍보는 뒤로 미루고 환상의 세계만을 보여주다보니 상품까지 잘 팔리게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L사의 휴대폰 광고는 S씨가 좋아하는 광고이다. 검은 옷을 입은 장동건이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신비의 여인 신애를 뒤쫓아 간다. 등에 땀띠 날 때까지 뛰어 가까스로 여인을 잡으려는 찰나, 여인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 S씨는 자기가 처음 몽정을 했을 때 꾸었던 꿈과 똑같다며 키득거린다.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시대. 열심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영상들을 말로 표현해보지만 불완전한 언어로는 표현에 한계가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은 없다고 좌절한다. 오히려 ‘바보상자’ 안에서 펼쳐진 세계가 머릿속의 연상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는 하지만 소통할 수 없는 환상을 광고로 만든다면. 그만큼 효과 만점의 광고는 없다.”
S씨는 득의양양하게 결론을 내리고 필자에게 술 먹으러 가자고 졸라댄다.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주워 담는다.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 아파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애써서 S씨를 이해해본다. 솔직히 S씨의 단순함이 부러울 때도 있으니까.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