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1-12 : Special Edition - '광고,광고를 말하다!' 4- 광고 아이디어 - ① '카피'를 말하다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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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dition - ① '카피'를 말하다
 
  카피는 카피가 아니다  
최 병 광 | 카피라이터·목원대 겸임교수
picco51@hanmail.net
 

카피가 카피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처음 카피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오묘한 느낌, 카피를 행할 때의 뿌듯함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그 가치를 많이 잃어버렸듯이, 카피라는 말도 의미의 무게를 많이 상실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수도 없이 듣는 카피라는 말은 예전의 그 카피와는 사뭇 다르게 들려온다. 그리고 실제 카피라는 놈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그토록 멋있던 고등학교 때의 어떤 친구가 훗날 동창회에서 만났을 때는 왜 그리 초라했던지, 그 당혹스러웠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나는 받고 있다.
이런 질문을 받는다. “대표적인 카피가 뭐예요?”
그러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대표 카피가 뭘까? 대표 카피라는 것이 있을까? 사람들이 많이 기억하고 좋아했던 한 문장이 카피라이터의 대표 카피가 될 수 있을까? 나의 경우 ‘빨래 끝’이나 ‘힘 좋고 오래갑니다’같은 것을 두고 사람들은 대표 카피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만다.
카피라이터에게 대표 카피가 있을 수 있는가? 자기가 맡은 모든 광고가 대표가 되어야 한다.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광고가 아닌가. 광고주에게는 정말 소중한 제품과 브랜드가 아닌가. 그렇다면 카피라이터의 손에서 탄생하는 모든 카피 하나 하나가 살아 있어야 하고 대표 카피가 되어야 한다.
카피는 글로 쓴 것만이 아니다. 카피가 녹아 들어간 비주얼이 있고, 말없이 응시하는 모델의 표정에도 카피는 있다. 아트디렉터가 선택한 레이아웃이나 컬러에도 카피는 녹아들어 있다. 한 곡의 음악 혹은 한 마디의 효과음에도 카피는 존재한다. 인텔 인사이드의 ‘디디디딩’이라는 소리는 얼마나 많은 카피를 담고 있는가. 맥도날드의 노란색 M자에는 또 얼마나 많은 카피가 숨어 있는가.
카피를 글 솜씨로만 생각하고 덤비는 예비 광고인들이 많다. 카피라이터라는 명함을 갖고 다니지만, 아직 전략이 뭔지 이해 못하는 광고인들도 많다. 몇 년 차 카피라이터라고 말하지만, 소비자 심리도 제대로 못 읽는 광고인들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카피가 아닌 카피’를 날마다 만나고 있는 것이다.

카피는 경험의 복사다

‘카피’라는 말의 어원은 어디서 왔을까? ‘Copy’라는 영어는 ‘복사하다, 모방하다’의 의미 외에 ‘원고’의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원고’라는 말에서 광고의 ‘카피’가 생겼을까? 그보다 필자는 ‘카피’라는 말은 ‘복사’에서 온 것이라고 믿고 싶다. 현대사회에서 복사기로 하는 복사는 입력이 있고 출력이 있는 기계적인 행위를 말하지만, 광고카피에서의 복사는 ‘우리 머릿속의 생각과 감성을 아이디어와 글로 복사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머리는, 말하자면 고도의 기능을 가진 복사기다. 눈과 귀를 포함한 오감으로 받아들여진 입력내용을 머릿속에서 적절히 소화시켜 그것을 말과 글 혹은 비주얼 아이디어나 스토리로 복사해내는 기능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카피를 ‘복사’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각과 감성의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풍부한 경험을 가져야 한다. 경험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는데, 직접경험은 한계가 있으므로 간접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행히도 우리는 다양한 간접경험의 기회를 갖고 있다. 수많은 책·영화·음악·연극·인터넷 등 간접경험의 통로는 너무나 많이 열려 있다. 문제는 그 통로에 얼마나 많이 출입하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책은 무엇보다 중요한 간접경험의 방법이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 크리에이터가 많이 존재하는 현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은 학생들이 묻는다.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뭐냐고. 나는 서슴없이 몇 가지 조건을 이야기해준다. 그 중 하나가 책을 읽고 글을 쓰라는 것이다. 카피라이터가 되려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도 이런 질문을 한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본 책 중 감명 깊게 읽은 책 세 권을 들고 그 이유를 말해보라고. 그 답을 들으면 감이 잡힌다. 이 사람은 카피라이터로서 자격이 있는가, 혹은 카피를 쓸 수 있는 기본이 되었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
광고는 우리 시대의 문화의 한 분야다. 광고를 통해 사람들은 희로애락을 간접경험하고, 삶에 필요한 정보와 지혜를 배우며 문화적 감각을 키우기도 한다. 그렇다면 광고인은, 카피라이터는 스스로 먼저 문화적 소양을 길러야 한다. 시대감각과 문화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의식세계에서 경험한 것들은, 이를테면 ‘망각’이라는 것을 통해 무의식세계로 저장된다. 저장된 경험의 입자들은 어떤 기회에 서로 엉키고 만난다. 주로 같은 경험들이나 상관 있는 경험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만난 경험의 입자들은 새로운 입자로 탄생한다. 그것이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가 발상이라는 과정을 거쳐 다시 의식세계로 올라오는데, 바로 이것이 아이디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아이디어를 글로 표현한 것을 우리는 카피라고 부른다. 즉 ‘생각을 복사’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카피라이터에 의해 감동적이거나 설득적인 문장이 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선보인 크라운하임의 광고에서는 불치병에 걸린 여학생이 머리를 빡빡 깎고 병원에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여학생을 찾아온 친구가 모자를 벗어 보이는데, 역시 빡빡 깎은 머리였다. 아픈 친구를 단순히 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끼리 나눠 먹는 과자가 크라운하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명세빈이 머리를 깎고 출연한 이 광고는 당시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제품판매도 상승했다. 이 광고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출발했는가? 바로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다. 그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즉 ‘카피로 복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카피는 설득의 가치다

설득이란 ‘말씀 설(說)’과 ‘얻을 득(得)’이 합쳐진 단어다. ‘말씀’이란 ‘표현’을 말한다. 표현을 통해 뭔가를 얻어내는 것, 그것이 설득이다. 광고는 설득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너나없이 모두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한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완성은 자극과 반응이 모두 존재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방적인 자극만 있고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광고 중에는 일방적인 메시지로 점철된 것이 얼마나 많은가! 표현만 있고 반응이 없는 카피, 일방적인 메시지만 툭 던져놓은 무책임한 언어의 조각들, 주객이 전도된 크리에이티브…. 도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광고이며 카피인지 알 수가 없다. 카피라이터의 마스터베이션을 위해 광고주가 돈을 지불하는 것은 아니다.
두통약 광고를 보자. 타이레놀은 ‘화를 내고 기를 쓰고… 당신이 머리가 아픈 건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열정이 있다고 다독여 주는 놀라운 카피는 대단한 설득력을 갖는다. 설득이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교감의 장에서 소비자와 만나야 한다. 그런 장을 제공하는 타이레놀의 카피가 설득력의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카피를 쓰는 카피라이터는 무엇보다 언어적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언어란 것은 커뮤니케이션과 설득을 위한 수단이다. 이 수단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지 못한다면 카피라이터라는 명함을 버려야 한다. 설득의 가치가 없는 언어적 표현을 카피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
‘생각’을 나타내는 ‘사(思)’의 한자를 보자. 이 글자의 구성은 ‘마음의 밭’으로 되어 있다. 생각은 마음의 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각이 행동을 낳는 법이니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아무런 행동을 기대할 수 없는 건 자명한 이치다. 한 줄의 카피가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면 구매행동을 기대할 수 없다. 카피가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기에 사람의 마음부터 읽는 전략과 크리에이티브가 요구되는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화장품 브랜드인 시세이도는 놀라운 설득의 카피를 보여준 적이 있다. 바로 이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예뻐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 있어 주세요.’

카피는 여백의 문화다

헬 스테빈스는 <카피캡슐(Copy Capsules)>에서 이렇게 말한다. “좋은 카피는 자유의 여신상과 같다. 그것은 언제나 홀로 서 있지만 무언가 말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뭔가를 말하지만 결코 언어적이 아니다. 그것은 비언어적으로 사람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뭔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헬 스테빈스의 말을 생각하면서 자유의 여신상 사진을 보라. 그 비언어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꽃은 아무 말 없이 사람을 웃게 만들기도 하고 울리기도 한다. 꽃에게 언어는 없다.
우리나라의 언어는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커뮤니케이션이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없어도 사랑을 알았다. 눈빛만으로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았고, 마주 잡은 손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젖먹이 아기와 어머니에게 말이 있는가. 아기는 말없이 바라만 보아도 어머니와 뜨거운 감정이 교류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휩쓸리게 되었다. 서구의 문명을 무턱대고 받아들인 탓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만 사랑을 아는 그들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새로운 세대들에게 여과 없이 들이닥쳤고, 우리의 아이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동양화는 여백의 미를 가지고 있다. 한 점 툭 찍은 그림에서도 웅장한 산수를 느낄 수 있으며 휘갈겨 쓴 글자에도 미가 담겨져 있다. 동양화의 여백, 그 여백은 생각과 상상의 공간이다. 생각과 상상의 여지를 주기에 예술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여백은 그저 텅 빈 공백과는 다른 공간이다. 이 여백이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모습이다. 서양화는 대개 여백이 없다. 모두 색채로 채우고 있다. 마치 빈곳이 있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듯이. 즉 서양화는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언어적인 것보다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은 훨씬 경제적이다. 시간과 공간에서 함축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또 상상의 여지를 만들어 주므로 더 깊은 설득력을 얻어낼 수 있다. 언어로서 얻어낼 수 없는 설득까지 얻을 수 있다. 사랑한다는 백 마디의 말보다 따스한 포옹이 더 감동을 주는 법이다.
카피는 언어에서 출발하지만 꼭 언어적 커뮤니케이션만이 아니다. 카피는 비주얼 속에 녹아들 수도 있고 스토리를 통해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런 광고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고 또 배우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렇게 비언어적 수단이 언어적인 수단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데, 우리의 카피는 아직도 말이 많다. 언어적 표현에 몰두하고 있다. 누가 더 큰 소리를 낼 것인가를 내기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광고주를 탓할 일도 아니다. 광고주들이 원한다고 모든 이야기를 한다면 누가 귀를 기울일 것인가. 광고인들이 소비자에 앞서 광고주를 먼저 설득해야 하는 과정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광고주를 설득할 수 없는 카피라이터가 어찌 소비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카피라이터는 언어적 표현수단에 능숙해야 하지만 비언어적 수단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서구의 광고에서 비언어적 표현이 많이 보인다. 동양적 표현과 여백의 맛을 그들이 알아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꽉꽉 채우고 또 채우고 있다. 물론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과 그 활용에 앞서가는 광고인들과 카피라이터들이 많다.
언어적인 수단을 배우고 자라난 신세대 크리에이터들에게 동양화의 여백을 이해시키고 가르쳐야 한다는 논리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하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많은 흔적들을 찾아내어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이 갖고 있는 여백의 표현을 배우지 못한다면 카피의 속 맛을 모르고 수박의 겉만 핥는 셈이 된다.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상상의 여지를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광고가, 카피가 바보상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백의 맛과 멋을 알아야 한다. 상상을 자극하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테크닉을 배워야 한다. 카피는 자유의 여신상이며 들에 핀 한 떨기 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