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3-04 : 광고와 문화 - 가벼움을 넘어 오늘을 사유함!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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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왈 I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nicolao@joongang.co.kr

얼마전 서울대<대학신문(大學新聞)>사의 기자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이 신문사의 학술담당 기자들이었다. 나는 몇 차례 e-메일을 통해 그들이 나를 찾는 이유를 확인한 뒤, 약속시각을 정해 그들과 대면했다. 아마 신문사의 학술담당이라는 나의 ‘업무’ 때문에 그들은 그 수많은 기자들 중에서 나를 택했던 모양이다. 그런 배경에는 서로에게 공통된 고민거리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과 기대감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우리 사이에 고민거리의 공통점이 없지 않았다. ‘고고한’ 학술기자로서 이 새털처럼 가벼운 세상을 읽어내는 일이 여간 쉽지 않은 데다, 더불어 고고할수록 냉대받는, 독자들의 무반응에 나도 신세 한탄을 많이 하고 있던 터였다.
그들의 고민거리도 바로 이것이었다. “요즘 친구(학생)들은 도무지 학술기사를 읽지 않아요.” 그러면서 그들은 “어떻게 ‘ 읽히는’ 학술면을 만들어야 할 지 한 수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한동안 멍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매스컴이나 각 대학의 교수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던 요즘 대학생들의 한심한 지적 수준과 변화된 캠퍼스 라이프의 실체를 목도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깊은 사유(思惟)! 대학 도서관에도 없다!

소위 386세대인 나는 그 험악한 시절, 각 대학의 대학신문(서울대 것이 아닌 일반적 의미의)의 기능을 잘 알고 있었다. 뭔가 찾으려는 시대, 대학신문은 그나마 그런 갈증을 해결해 주는 지적 소통로였다.
신문이 나오는 날이면 부리나케 신문을 집어들고 삼삼오오 잔디밭에 모여 앉아 열독했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다. 마르크스(K. H. Marx)가 어떻고, ‘자본론’이 어떻고, 이념이 어떻고, 실천이 어떻고, 민주화가 어떻고 하던 시절.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무거웠던’ 시절이었지만, 그래서 행복했다.
나온 김에 요즘의 대학(생) 이야기를 더 해 본다. 대학생이 사회전체, 아니 젊은이들의 전체를 대변하는 표준 집단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당대 젊은이들의 경향과 트렌드를 읽는 대표집단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아 자꾸 대학생 운운한다. 이 점에 대해 서는 독자들의 양해가 있으시길 바란다.

그 대학생들의 가벼움이 어느 정도냐 하면, 그들이 즐겨 읽는 요즘 인기 도서는 ‘팬터지 소설’이란다. 이 도서목록엔 대출할 학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장차 정말로 피와 살이 될 학술·교양서는 파리를 날리고 있다고 한다. 하긴 꿈만 먹고 산다면 팬터지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안 읽고 허송세월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대학교가 이미 취업준비를 위한 전쟁터가 되었다고 하는 마당에 그것이라도 읽고 머리를 식혀야 하지 않을까?
하긴 세상이 다 가벼운데 애꿎은 대학생만 나무랄 수는 없다. 대통령을 지낸 인사의 ‘회고록’조차도 그 가벼움의 범부에서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을 정도다. 이처럼 ‘역할모델’이 부재한데, 젊은이들이 뭘 보고 배우란 말인가. ‘가벼움’ 이란 가히 21세기 벽두의 한국 사회를 읽는 키워드임에 틀림없다.

좀더 이야기를 확장해 보면 그 실체는 전 사회적으로 광범위하다. 매스미디어의 총아라는 TV를 보자. ‘바보상자’ 바로 그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무차별적 선택을 강요하는 TV의 파괴력은 가공할 위력을 가졌다.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닌데, 이른바 오락프로그램들의 저질 경쟁은 그칠 줄 모른다. 학술담당 이전에 방송분야 취재도 한 사람으로서, 단언컨대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사회에서 철들지 못하는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방송의 오락프 로그램이 아닌가 한다. 참, 정치인도 있으니 그 다음이라고 할까?

이런 오락프로그램의 경우 연예인들이 떼거리로 나와 신변잡기나 늘어놓고, 그걸 웃음대결이랍시고 해댄다. 그 내용이 썰렁할수록 그 연예인의 ‘자리’가 상위로 올라가는 프로도 있다 . 그것이 시청률이 높으면 그 다음날 다른 방송국은 여지없이 ‘베끼기’에 나선다. 이런 식으로 저질의 악순환과 반복이 이어진다.
이 뿐인가. 성적(性的) 코드로 일관하는 시트콤, 패러디를 극대화한 광고, 이모티콘(emoticon. emotion과 icon의 합성어)이라나 뭐라 하는 기기묘묘한 사이버 채팅언어의 남발 등 표피적인 가벼움 경쟁은 첨단을 달린다 할 정도로 극심하다.

생각하다가는 뒤처지는 위험한 사회

그럼 왜 이처럼 가벼움과 경박함이 시대의 화두로 등장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디지털시대의 도래를 주된 원인으로 꼽는 것 같다. 텍스트보다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디지털시대에는 사람들의 깊은 사유보다는 말초적인 감각을 우선한다.
그런 감각의 생산공장은 영화와 TV, 만화, 현란한 광고물, 사이버 공간 등이다. 이곳을 통해 생산되는 온갖 이미지들은 우리의 눈을 현혹하고, 정신을 물들이며 욕망을 자극한다.

그뿐인가. 디지털 정보화 기술의 급속한 발달은 이런 이미지들을 더욱 신속하게 다량으로 유포시키는 일을 가능하게 했다. 이 때문에 말도 이미지를 닮아 빨라지고 경박해지며, 그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다 보니 깊은 사유를 할 겨를이 없게 된것이다. 사유가 없는 말이 공허한 것은 당연하다. 텍스트의 집합체인 책을 멀리하는 대신 영화나 만화, 영상 등 이미지의 공장만 좇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런 경향을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런 디지털시대의 도래는 한국 사회 특유의 조급증과도 잘 맞아 떨어져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일면도 없지 않다.

한국은 지난 세기 근대화를 화두로 해서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근대화에 도달하기도 전에 세상은 급변했다. 일제하의 식민지시대와 전쟁, 개발, 독재, 민주화 투쟁 등 사회적인 격변의 소용돌이에서 허겁지겁 빠져 나오려는 노력, 즉 근대화를 위해 진력하는 동안 세상은 포스트 모던(Post Modern)을 거쳐 작금의 세계화에 이르렀다.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는데 그보다 더 어려운 난관이 물밀듯이 우리 사회를 엄습한 것이다. 누구는 이런 것을 두고 ‘ 압축근대’에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제대로 아날로그시대를 살지도 못했는데 디지털시대가 코앞에 닥쳐와 우리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뭔가를 한번쯤 생각하다가는 벼랑에 떨어지고 마는 백척간두의 ‘위험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이러니 그 구성원들의 마음이 조급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쯤에서 보면, 경박스러움은 오히려 자연스런 시대의 흐름이며 올바른 삶의 지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진지한 문화, 지식사회의 미래상을 생각할 때

그러나 이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오히려 냉정한 성찰이 필요하다. 지금이라도 그런 성찰의 기회가 없다면, 일말의 해법조차 찾을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사회로 전락할 지도 모를 일이다. IMF의 구제금융이 경제분야에 국한한 경고성 메시지였듯이, 지금 경박함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우리에게 이와 비슷한 제2, 제3의 경고성 메시지가 언제 날아들지 모를 일이다.

얼마전 세기의 전환기에 이런 저런 명망가들이 저마다 새 세기를 진단했다. 이를테면 21세기에 대한 청사진이다.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눈에 띄면서 설득력 있는 말은 ‘지식사회’의 도래를 언급한 말이었다. 지식사회란 학력이 아닌 지력(智力)으로 평가하는 사회를 뜻하는데, 21세기는 바로 그런 사회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분명히 그런 지식사회는 지금 같은 말초적인 경박함, 가벼움이 판을 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비록 가벼움을 외피(外皮)로 뒤집어쓰고 있다 하더라도 내면에는 알찬 메시지가 담겨 있는 진지한 문화, 그것이 디지털로 무장한 지식사회의 미래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해법의 단서를 제공하는 일종의 신드롬이 올 상반기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도올 김용옥의 ‘논어’ 강의다. 나는 이 기현상에 경박한 사회를 효과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도올의 ‘논어’ 강의는 경박함의 주도적 매체인 방송(TV)과 가장 고답적인 ‘논어’가 만나 가장 대중적인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도올과 연출가는 이를 ‘지적인 쇼’라고 규정했다. 여기서는 강사의 ‘경박함’도 결국은 좋은 목적을 위해 기능하는 부수적인 요소일 뿐 본질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센세이션에 집착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한국의 방송사에서 과연 이처럼 대담한 ‘지적(知的)쇼’가 있었는가. 그것이 어떤 식으로, 또는 아무리 비난받아도 신변잡기나 늘어놓는 몇몇의 토크쇼보다 수십 수백 배로 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물론 우리의 문화가 다 이처럼 계산적이며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다양성이야말로 최고의 미덕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떤 현상에 대한 일시적인 ‘쏠림’이 너무 심하다는게 문제다. 남이 뭐래도 꿋꿋하게 제 갈길을 가는 의연함과 진지함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보면,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있다. 취업에 필요한 배움에 죄다 관심을 갖다보니 순수학문 , 이를테면 철학이니 문학이니 하는, 인간의 성정(性情)을 순화하는 학문을 경시하는 것이다. 대학원에서 이 분야를 전공하겠다는 학생들은 전무하디시피 하다. 밥 빌어 먹기가 힘들다보니 이해는 가는 일이지만 장기적으로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가볍고 경박한 사회는 분명 거친 사회다. 이런 사회일수록 썰렁한 유머로 남을 웃기는 ‘엽기사이트’가 폭주한다. 이제 경박함은 경험할 만큼 경험했으니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텍스트의 세계, 즉 책의 세상으로 눈을 돌려 장기적인 지혜를 모색해 봄은 어떨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 지식사회가 도래한다해도 그 바탕은 아날로그이며 사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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