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1-12 : 광고적으로 본 역사 인물 - '삼국지'의 조조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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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曺操), 중원을 가졌던 당대 최고의 전략가
 
 
 「삼국지」의 조조
 
박 운 기 국장 | 기획1팀
wkpark@lgad.lg.co.kr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해 이런 말이 나온다.
어린시절 조조의 관상을 본 점성가가 “치세에는 능신(能臣), 난세에는 간웅(奸雄)이 될 팔자로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또한 「삼국지연의(元末 明初의 나관중 著)」 속의 조조는 악의 전형으로서 간사하고 비정하며, 절대 본받아서는 안 될 배척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 조조를 배우자고? 웬 정신 나간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사(正史) 「삼국지(진 수 著)」에서는 조조를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걸(非常之人 超世之傑)로 적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동양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조조의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
 
조조는 과연 난세의 간웅인가?
조조는 후한(後漢) 말 대혼란기에 중원(중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통일했다. 그 중원통일 과정은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고 뛰어난 지도력과 용병술을 발휘한 덕분이라는 것이 조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학자들의 중론이다. 뿐만 아니라 조조는 중국문학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시인이자 문학가이기도 하였다.
그런 조조는 당나라 때까지는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 받았으나 남송 이후 급전직하, 역사의 간웅으로 폄하되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원(元)나라·금(金)나라 등 한족(漢族)이 아닌 주변의 민족이 중원을 차지하자 한족의 민족주의적 애국심 발동으로 조조는 졸지에 영웅에서 타도의 대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즉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 삼국 중 촉한이 한나라의 정통성을 가진 나라라는 이론)’이 힘을 얻게 되고, 그에 따라 유비가 정통성을 가진 인물로 부각된 당시의 상황에 덧붙여 나관중의 좥삼국지연의좦에서 나타나는 소설 속의 이야기가 마치 진실인양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여기에 주희(朱熹)의 성리학과 명분론은 조조의 일거수일투족을 부정적으로 매도하기에 이르렀고, 그 주자학이 학문과 정치사상의 핵심으로 등장하자 조조는 졸지에 최고의 영웅에서 희대의 간웅으로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제 학자들에 의해 조조는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복권되어 위대한 전략가이자 정치지도자, 문학가로서 동양 최고의 영웅으로 재해석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며, 인간적이고 정열적인 아주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손무를 한 수 아래로 두다
우리는「손자병법」을 광고 마케팅 전략에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손자병법」은 무엇인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춘추시대 중기 오(吳)나라 손무(孫武)와 그의 후손인 제(齊)나라 손빈(孫賓)이 쓴 병법서를 통칭하는 것으로 후한 말 당시에는 원본은 없어지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조가 관련 문헌을 수집, 13편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붙여 후세에 전한 것이므로(孫子兵法 魏武帝註-위나라 무제가 손자병법을 이해하다), 「손자병법」은 조조가 다시 만들다시피 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조조는 수많은 실전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좥손자병법좦을 다시 쓴 것이고, 그것이 현재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즉「손자병법」에 스스로 주석을 달만큼 전략(병법)에 탁월했다는 것이다.
위무주 손자병법에서 조조는 손무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그의 밑에서 「손자병법」을 읽지는 않았다. 손무가 비록 뛰어난 전략가이기는 했으나 오왕 합려(闔慮)의 참모에 불과했다면, 조조는 천하를 경영했으며 인재를 한 손에 쥐고 흔들면서 역사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로서 오히려 손자보다 한 수 위였다면 역사를 너무 과장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조조는 「손자병법」을 어떻게 다듬었을까?
먼저 각 편을 자기 시대의 언어로 간편하게 요약한 후 핵심을 찌르는 몇 글자의 말로 압축하여 설명한 것이 눈에 띈다. 손무의 논지(論旨)를 일일이 따지며 찬찬히 풀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실전 경험으로 손무의 부족함을 넌지시 메워주거나 독창적인 견해로 한마디 가르쳐 주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두 천재가 어깨를 맞대고 머리싸움을 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 전략들은 현재 우리가 쓰는 광고 마케팅 전략에 매우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다. 해석을 새롭게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지금의 상황(마케팅도 전쟁이므로)에 응용하여 사용하면 될 정도이다.
그러면 조조가 금과옥조로 삼았던 그 내용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 주요한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싸우기 전에 다시 한번 계산하라.
2. 적에게 빼앗아 싸워라.(제한된 사람과 경제 조건하에서는)
3.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4. 적의 힘을 나의 힘으로 바꾸어라.
5. 압도할 듯 쏟아지는 기세를 유지하라.
6. 승리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7. 늦게 출발하여 먼저 도착하려면 돌아가라.
8.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과 함께 뜨고 함께 가라앉아라.
9. 정찰하지 않고 움직이면 반드시 패배한다.
10. 땅과 하나가 되어라.
11.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곳을 골라 뜻밖의 방법으로 찔러라.
12. 모든 것을 태우기 전에 결과를 생각하라.
13. 정보전에서 승리하는 자가 마지막 승자가 된다.

- 이상 「조조병법」(유동환 지음)

특히 ‘땅과 하나가 되라’는 것은 자기가 싸워야 할 곳은 꼭 머리 속에 넣어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음미할 만하다. 우리의 싸움터(현대적 의미의 市場)의 조건을 언제나 머리 속에 깊이깊이 간직하고 전략을 세우는 것, 백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이야기이다.
절묘한 헤드라인, ‘계륵(鷄肋)’
조조는 위대한 전략가뿐만은 아니었다.
조조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가중의 하나라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수많은 문학 작품을 통해 중국 산문의 개조(改祖; 魯迅의 말)로까지 인정 받았다. 그의 문장은 형식적이고 고답적인 것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었는데, 상투적인 문장은 쓰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말 한마다 한마디는 상황에 맞춘 절묘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백미 중의하나는 그 유명한 ‘계륵’이란 말이다.
건안 24년, 조조가 아끼던 맹장 하후연이 한중 양평관에서 유비와 싸우다 죽었다. 한중은 천하통일을 위한 지리적 요충이었고, 어렵게 손에 넣어 하후연에게 지키게 했던 곳이므로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비와의 일전을 위해 조조가 직접 이곳에 왔다. 싸움은 조조의 뜻과는 달리 지구전으로 바뀌었고 먼 곳에서 온 입장에서의 전쟁은 군수물자 조달에 어려움으로 겪을 수밖에 없어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조조는 일거에 유비를 무찌를 심산으로 이곳까지 왔지만 유비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 역시 녹녹치 않아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런 저런 이유로 철군을 원했지만 이 역시 명분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자존심 상하지 않고 철군하고자 하는 뜻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조조는 군령을 물어보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계륵!”

무릇 ‘닭의 갈비’란 버리자니 서운하고 먹자니 별게 아니니, 철군하고 싶다는 의지를 자존심 상하지 않게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다. 이런 발상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크리에이티브적’인 것이 아닐까? 조조는 이런 표현을 즐겨 사용했었다고 하니, 그 방면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셈이다.
 
광고인으로서의 조조
물론 조조시대에 광고는 없었다. 무슨 출사표니 격문이니 하는 것은 있었지만 그것도 조조가 직접 쓴 것은 없었다.
그런 조조가 현세에 와서 광고를 한다면 대단한 전략적 사고를 가진 위대한 광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정보를 중요시 하며, 준비와 전략적 계산에 치밀하고, 항상 자신이 처한 상황을 철저히 숙지하고 분석하는 위대한 전략 수립과 실천력을 가진 광고인으로 말이다.
어디 그 뿐일까? 그의 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능력만으로도 그는 가장 훌륭한 카피라이터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