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06 : Special Edition - 멀티미디어 시대의 活字와 映像 - 읽기와 보기의 커뮤니케이션적 의의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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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said? vs. how it is said?
 
 
  멀티미디어 시대의 活字와 映像
  1 - 읽기와 보기의 커뮤니케이션적 의의
 
최 윤 식 | 광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yschoi@hosim.kwangju.ac.kr
 
‘읽기’는 고귀했고 ‘보기’는 비천했다
   
 
   
“일획이 만획이요 만획이 일획이니, 내 일획을 두고 어찌 따로 법을 말하리요.”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 중심의 회화관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퍼붓는다. 단원 김홍도·혜원 신윤복이 당대 최고라니까 나도 단원이고 혜원이라며 오원(吾園)이라는 호를 고집했던 그다. 추사 김정희는 “그림에는 가슴 속에 만 권의 독서량이 쌓여서 피어나는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흘러야 한다”고 했고, 문자향·서권기는 조선 그림의 법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선비가 추구하던 ‘학예일치(學藝一致)’도 학이 중심이었고 예는 주변이었다. 글을 하는 사람은 관리가 되고 출세를 해도,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은 천민이거나 기껏해야 도화서1) 화원이 되는 것이 최고의 출세였다. 비단 지난 얘기일 뿐이 아니라, 이처럼 언제나 읽기는 고귀했고 보기는 비천했다. ‘문자 텍스트’와 ‘읽기’만을 유일한 지적, 윤리적 이상으로 삼아 시각적 이미지를 천박한 볼거리로 폄하하는 태도는 학계의 완고한 편견 중의 하나이다. 이미지 또는 아이콘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이미지를 마땅히 파괴되어야 할 단순 허상 혹은 우상적 오류로 인식하며 영상 이미지가 지적 열등성·소비주의·타락·기만·윤리적 결여 등을 파급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러한 경향은 광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광고는 ‘카피와 비주얼의 행복한 결혼(integration of art and copy; Bernbach)’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광고가 비주얼과 카피(언어)의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소비자 정보처리 과정에서 비주얼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소홀하게 취급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광고효과는 주로 언어적 메시지에서 발생한다고 간주하여 비주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비주얼을 언어의 보조물 정도로 인식하기도 하고, 광고학의 영역보다는 디자인 분야에서의 관심사 정도로 치부해 온 것이다. 스콧(Scott)은 이러한 편견 때문에 ‘광고 이론’ 대신에 ‘카피 이론’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비주얼을 포함한 광고 효과를 테스트하는 데 이용되어 왔던 ‘카피 리서치(copy research)'와 ‘카피 테스트(copy test)'라는 용어들은 카피를 언어물로만 생각하는 일종의 편견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한편 마리케 드 무이(Marieke de Mooij)는 비교문화론적 관점에서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이나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관행, 지적 스타일은 전문가들이 광고효과에 가지는 사고방식을 보여준다”면서 광고효과를 설명하는 데 가장 자주 이용되는 정보처리이론이 도표나 그 밖의 비언어적 자극을 무시한 채 문자나 언어행위에 편중된 인지심리학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Mehravian Ferris는 사람들이 의미 전달을 하는 수단으로 언어를 이용하는 비율은 오직 7%에 지나지 않으며, 38%는 전달하는 말의 비언어적 요소를 통하여(목소리의 크기·빠르기·높낮이 등), 그리고 55%는 얼굴 표정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뉴욕대학의 교육심리학자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는 사람들이 듣는 것의 단지 10%만을, 읽은 것의 30%만을 기억하는 데 비해 본 것의 80%를 기억한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한다. 차일더즈와 휴스턴(Childers and Houston) 또한 광고를 접할 때 소비자들이 언어적 메시지보다는 비주얼을 더 많이 기억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비주얼이 소비자의 정신적 영상을 자극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언어보다 기억에 더 용이하다는 것이다.
 
 
왜 광고도 비주얼 중심으로 변하는가
소위 ‘이미지 정치’시대를 열었던 1960년 미국의 케네디 대 닉슨 간의 선거 토론은 ‘보는 것’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실증해 보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라디오를 통해서 이 토론을 들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닉슨이 이겼다고 생각한 데 비해, 텔레비전을 통해 이 토론을 지켜봤던 많은 사람들은 케네디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케네디가 닉슨에 비해 더 젊고 활달하게 행동했으며, 닉슨이 케네디를 상대로 토론한 데 반해 케네디는 텔레비전 카메라를 쳐다보면서 미국 국민을 상대로 토론을 했다는 점이 많은 정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에 의해 승인으로 분석되었다. 이로부터 공약보다 후보의 시각적 이미지가 당락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현실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지금 ‘읽는’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서 ‘보는’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로 빠르게 전이되고 있다. 현재 우리는 비트와 디지털 이미지에 하부 기초를 둔 새로운 영상정보시대에 돌입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매체 기술의 변화가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문명사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영상 이미지의 폭증은 인문학과 예술은 물론 자연과학과 공학 영역에까지 급격한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바야흐로 이미지 영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에 따라 각 대학들도 영상 관련 학과들을 신설하고 있으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시 받던 만화·게임·애니메이션 등 시각적 매체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제 마케팅이나 광고활동의 가속화에 따라 기존의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문제가 주요 과제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스 미디어의 폭발로 인한 정보 유통량의 급증으로 광고에 대한 보다 쉽고 빠른 이해가 긴요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도전에 대한 대응으로 광고에 있어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과거 언어 중심의 광고는 이제 비주얼 중심으로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광고에서 비주얼이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비주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진실성이 디지털 기술의 보편화로 심각하게 도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림은 쉽게 조작될 수 있지만 사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복제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비주얼에 대한 저항감이 적기 때문이다. 우리를 설득하려는 언어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항하거나 부정적으로 반응하려 하지만 비주얼은 그러한 논리적인 반응을 도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비누를 사용하면 누구나 아름다워진다’는 언어적인 메시지에 대해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그 비누를 들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 모델의 사진에는 전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셋째, ‘비주얼은 언어와 국경을 뛰어넘는 범세계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점은 특히 국제광고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웃는 모습이나 우는 모습 등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비주얼들은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문화간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되고 있다. 따라서 국제광고에서는 언어적 요소보다는 이러한 비언어적 요소에 대한 고려가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비주얼이 언어와 문화를 완전하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비주얼도 문화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비주얼은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표현의 소재도 거의 무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무언 의사소통 연구가인 레이 버드위스텔(Ray Birdwhistell)은 우리의 얼굴을 사용하여 무려 25만 가지 이상의 표정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와는 반대로 언어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얼굴 표정은 과연 몇 개나 될까?

언어(카피)와 비주얼의 커뮤니케이션적 특징
그 동안 언어 중심의 연구 경향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비주얼의 논리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순수한 이미지 자체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구명하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와 이미지의 양자의 관점에서 상호보완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부류들이다. 아른하임(Rudolf Arnheim)이나 존 버거(John Berger)와 같은 이들이 전자의 학자들이라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등은 후자에 해당하는 학자들이다. 그 중 후자적 연구 경향은 다분히 기호학적 접근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연구 대상을 주로 광고로 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언어는 코드성이 강한 반면 시각적 이미지(영상)는 코드성이 약하다’고 설명된다. 따라서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영상 커뮤니케이션은 메시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코드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 쟝 루이 셰퍼(Jean-Louis Schefer)는 “이미지는 선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체계적인 텍스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며, 철학자 하노 하트(Hanno Hardt)는 “텔레비전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요소인 단어를 대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앞으로 단어들은 사업적 수단으로서의 관료적인 거래, 그리고 오직 소수의 개인만이 읽게 될 책에서만 사용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확실히 보는 것에 비해 읽기는 점점 더 쇠퇴하고 있다. 두뇌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역시 보는 것이 읽는 것보다 편하고 쉽다는 것도 ‘읽기 쇠퇴’의 한 요인임은 분명하다. 이에 비평가들은 범죄의 증가에서 교육제도의 악화에 이르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우리가 매일 보는 이미지의 증가에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의 연장선에서 영상매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텔레비전이 ‘바보 상자’에 비유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상 이미지는 동(動)영상이냐 정(靜)영상이냐에 따라 영상 메시지의 구성 원칙이 서로 다르다. 영화나 텔레비전의 동영상이 시간적 전개에 따른 선적인 내러티브에 주로 의지한다면, 정지상태의 예술사진·광고사진·저널리즘 사진 등은 프레임 내부에 표현되어 있는 요소들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의해 주로 의미를 생산한다. 이에 <문화비평>의 저자인 버거(Arthur Asa Berger)는 “시각적 이미지는 커뮤니케이션의 강력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추상적 개념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감정 유발과 전달의 수단이고, 창의력 촉진의 수단이자 무의식의 세계까지 드러내 보여준다”고 말한다. 또한 폴 메사리(Paul Messaris)는 시각적 이미지 광고의 두 가지 역할을 ‘광고에 주목하게 하는 것’과 ‘특정 감정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개 광고에서 언어(카피)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개념적·내용적 차원(what is said)을 담당하며, 비주얼은 전달되는 의미의 사회적·관계적 차원(how it is said)을 담당한다. 광고를 통한 의미 전달 및 공유 과정에서 언어와 비주얼은 서로 다른 차원을 중점적으로 담당하는 역할 분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광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비주얼의 특성은 장점이자 약점이 되고 있다. 비주얼은 의미의 표현력 측면에서 언어보다 월등히 우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광고에서의 비주얼은 소비자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구성하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언어(카피)와 같은 분명한 상징성을 지니지 못하는 한계 때문에 의미의 전달력 측면에서 많은 오해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광고에서의 이러한 언어와 이미지(비주얼)의 관계를 ‘정박’과 ‘중계’로 설명한 바 있다. 폴 메사리 또한 광고에서 시각적 이미지의 속성들이 광고주들에 의해 어떻게 약점이 아니라 강점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한 바 있다. 즉 광고주들은 광고에서 시각적 이미지의 이러한 약점을 보강하고 메시지의 명확화를 위해 카피와 같은 광고언어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반대로 비주얼의 명제적 구문의 불명확성이라는 특성을 통해 광고 규제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제 그러한 예는 술이나 담배와 같은 반건강성 제품이나 섹스와 같은 반사회적 광고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읽기와 보기는 따로 국밥이 아니라 보통 국밥이다
작가 헉슬리(Aldous Huxley)는 저서 <보는 법(The Art of Seeing)>에서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본다”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했다. 퇴행성 각막염으로 고생하던 그가 스스로 찾아낸 결론은 ‘정확히 본다는 것은 주로 명확한 사고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헉슬리는 ‘감각(sensing)+선택(selecting)+지각(perceiving)=보기(seeing)’라는 공식으로 정확하게 보는 방법을 요약했다. 즉 바르게 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 인지적 노력이라는 것이다. 감각하고 선택하고 지각하는 과정은 면밀한 살핌과 식견이 있는 마음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know → sense → select → perceive → remember → learn → know → sense....’로 이어지는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의 원형구조를 제시했다.
그런데 마틴 졸리(Martine Joly)는 이러한 이미지와 언어의 상반관계가 ‘거짓된 상반관계’라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언어와 이미지는 상호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흔히 사용하는 ‘이미지의 폭발’이니 ‘이미지 문명’이니 하는 말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즉 이미지가 말의 언어를 제거 또는 대치한다는 것은 틀린 주장이라는 것이다. 물론 광고도 대부분 ‘말의 언어’와 ‘이미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말의 언어가 없다면 이미지 상자인 텔레비전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것인가”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또 시각적 메시지의 허위성과 진실성도 말의 언어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미지의 진실성과 허위성은 이미지가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표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쓰여진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말과 이미지의 관계를 배타적인 관계로 파악해온 기존의 접근방법은 문제가 있다. 말과 이미지는 상호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 내지 상호작용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정박’이나 ‘중계’도 이미지-텍스트간의 상호작용의 형태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 상호작용 속에서 텍스트는 ‘이미지 독법의 높은 수준’을 나타낸다.
 
   
 
이에 프랑스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이렇게 말했다. “말과 이미지, 그것은 의자와 테이블 같은 것이다. 식사하고자 할 때 의자와 테이블 둘 다 필요하지 않은가?”
이러한 말과 이미지의 상호작용은 근년에 이르러서는 ‘연계’의 차원에서 나아가 ‘융합’의 차원으로 전이되고 있다. 또한 그 동안 엄격하게 구분되던 말과 비주얼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현상은 이른바 N세대들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확산된 이모티콘(emoticon)에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즉 CMC(Computer Mediated Communication) 언어는 비주얼과 카피의 융합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 전반의 이러한 퓨전 현상은 언어와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읽기와 보기는 서로 다른 것일 뿐, 무엇이 더 낫고 못한 것이 아니다. 서로의 특성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적재적소에 제대로 쓰는 지혜가 필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아트 디렉터와 카피라이터는 짝꿍이다. 광고가 카피와 아트의 행복한 결혼이듯 카피라이터와 아트 디렉터는 찰떡궁합이어야 한다. 그러나 카피라이터에게 맡겨진 임무는 백 장의 사진보다 더 강한 한 마디의 말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의 단짝 파트너, 아트 디렉터를 무능력자로 회사 밖으로 내쫓는 것이다. 반대로 아트 디렉터에게 맡겨진 임무 또한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1) 도화서(圖畵署): 조선시대 그림그리는 일을 관장한 관청으로 예조(禮曹)에 소속된 종6품 아문(衙門)이다. 도(圖)는 도해(圖解)나 도설(圖說)에 필요한 그림으로, 복식(服飾)·각종 그릇·수레·도량형기 등의 그림과 조하도(朝賀圖)·배반도(排班圖)·각종 찬실도(饌實圖) 등이고, 화(畵)는 인물·산수(山水)·화조(花鳥) 등의 회화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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