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06 : Culture Club - 위조 진단서와 ‘스탠딩 트렌드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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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 진단서와 ‘스탠딩 트렌드’
 
 
 Culture Club ‘Standing’도 Trend?
 
정 성 욱 | 영상사업팀
swchung@lgad.lg.co.kr
 
# 1. 기립하라, ‘교양’ 있게
 
   
 
1750년 런던. 헨델이 작곡한 오라토리오(oratorio) <메시아> 중 3부 ‘부활과 영생’ 부분 마지막 곡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홀 내에 울려 퍼지자 국왕 조지 2세는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곧 ‘권력구도(hierarchy)의 도미노’ 작용에 의해 극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벌떡벌떡 따라 일어난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사실은 그냥 전설일 뿐이다. 실제로는 평소에도 시간관념이 부족했던 조지 2세가 연주회장에 늦게 나타났고, 게다가 교양 없이 진행중인 연주를 무시하면서 입장했기 때문에 신하와 귀빈들이 공연 중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는 주장 쪽이 더 그럴 듯하게 들린다(교양은 멀고 정치는 가깝다). 지각 때문이든 다리 저림 때문이든 아니면 진짜 감동해서든 그 유래의 이유나 사실이 어떻든 간에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메시아>의 마지막 곡이 연주되면 모두 기립하는 것이 ‘교양’으로 간주된다.
기립으로 경의를 표한다는 관습. 요즘도 많은 영화의 홍보문구에서 종종 발견되는 ‘기립박수’라는 개념 역시 이와 같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공연이나 영화 같은 문화적 재화가 전달해 주는 감동이 특이점에 달할만큼 좋으면 그 좋은 감정을 일반성을 벗어난 행동, 즉 기립을 통해 표현한다는 말인데, 여기에는 ‘착석은 일반’이고 ‘기립은 특수’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일단 공연이란 모름지기 앉아서 보는 것이라고 기정(旣定)되어 있다는 뜻이다. “불편한 몸이 교양을 받아들일 마음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라는 식의 독트린이라도 따르는 것일까. 그러나 어떤 공연은 이런 ‘몸의 불편’을 잊게 할만큼 강한 유포리아(uphoria)를 경험하게 하는 모양이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서서 봐도 불편하지 않으니 말이다.
 
# 2. 서서 뛰다, ‘發光’하다
   
 
       
1994년 8월, 텍사스의 한 도시 외곽. 전날 내린 비로 바닥이 질퍽한 가운데 1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스래쉬 메탈의 전설 ‘메탈리카(Metallica)’의 공연을 보기 위해 허허벌판에 모여든다. 20년 전에 농장이었던 이곳에 인공의 구조물이라고는 광장의 끝에 제단처럼 설치되어 있는 초대형 스테이지뿐. 오늘 밤 이곳에서는 공연이 벌어진다. 그러나 잠실운동장 넓이의 광장 어느 곳에도 의자는 놓여져 있지 않다. 의자가 무슨 필요인가.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누가 메탈리카의 공연을 앉아서 보고 들을 수 있는가. 이들은 공연 내내 서있었다. 아니, 단순히 서있는 것뿐 아니라 음악에 맞춰 발광에 가까운 몸짓들을 한다.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고 서로 몸을 부딪히고 스테이지로 기어 올라가 사람들 머리 위로 뛰어내리고 몸은 땀으로 범벅되고 머리는 빈혈 같은 현기증에 젖어 있다.
홍대 앞의 ‘드럭’을 비롯한 많은 공연장을 한번이라도 다녀보신 분들은 그 장면이 전혀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서서 듣는 음악은 혼을 빼놓을 만큼 즐겁다는 것, 땀 흘리고 생판 모르는 사람과 몸을 부딪히면서 때로는 발을 구르기도 하고 때로는 공연자를 향해 찌를 듯 손을 뻗어 보기도 하는 스탠딩(standing) 콘서트의 매력을 많은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뒤늦은 주류 언론이 스탠딩이란 말을 상용구로 쓰기 훨씬 전부터 말이다.
 
# 3. De La Guarda
   
 
       
앉아서 공연을 보는 것이 그야말로 ‘방관’이라면 서서 보는 것은 ‘참여’다. 그것은 사뭇 고대 그리스의 바커스축제 같은 제의(祭儀)다. 공연자와의 거리 좁힘이다. 공연이 마련해 주는 한시적인 모종의 특별한 결사(結社)의 일원이 되는 행위다. 스탠딩은 공연자와 관람자간의 관계뿐 아니라 관람자끼리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공연장이나 극장에서의 좌석은 개인적 영역이다. 번호가 적혀 있든 선착순으로 와서 앉았든, 내가 앉은 좌석은 나의 일시적 소유물이자 경계로서 옆 자리의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영역으로서의 좌석이 결여된 스탠딩에서는 개별적 자아조차 시각적·청각적 자극을 용매 삼아 한 덩어리의 집단의식으로 녹아버린다.
이런 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작년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장기공연중인 <델라구아다(De La Guarda)>이다. 서있는 관중들 위로 천정에 매달린 공연자들이 뛰어 내린다. 관중들은 공연의 일부다. 단지 봐주는 사람 혹은 기록자의 피동적 입장을 넘어서 그들은 공연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공연의 소품이 되기도 하고, 공연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런 제의적 일체감을 잊지 못하는 관객들은 이 공연에 사로잡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오게 된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서있었다
최근 언론 매체에서는 ‘스탠딩’이라는 말을 자신의 트렌디 사전에 추가시켰다. 마치 실체가 없고 개념뿐이었던 ‘X세대’와 마찬가지로, 이 말은 기성세대를 겁주고 젊은이들을 소비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식 매체 운용의 한 도구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편한 게 편한 거라고, 이 개념에 급조된 분류를 적용시켜 ‘스탠딩 문화’라는 조악한 패키지를 만들어 내놓고 있다. 이 스탠딩 문화라는 패키지 안에는 서서 보는 공연, 서서 하는 파티 등 인문학적 견지에서는 전혀 상관 없는 것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구색을 맞추고 항목을 늘리기 위해 ‘스탠딩 코미디’라는 국적 불명의 용어까지 만들어 같은 스탠딩 패밀리 리스트에 추가시켰다(스탠딩 코미디라는 말은 없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정확한 명칭이다). 이런 식의 트렌드 리포트를 읽노라면 마치 요즘 젊은이들이 갑자기 서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든다. 그리고 여기 그럴 듯하게 일부 몇몇 사람들은 위조된 진단서 끊어주듯 ‘바쁘게 돌아가는 완성체의 산업사회에 걸맞은 트렌드’ 라고 전문가의 소견을 첨부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하철 경로석 위에 붙은 ‘나는 젊으니 서서 간들 어떠리’라는 표어처럼 늙은이들을 소외(?)시키기 위해 가열찬 노력을 하고 있는 언론에 의해 설정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새로 도입시킨 것은 아니다. 일어서서 보는 공연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선 채로 교류하는 파티 역시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내가 어제 코끼리를 처음 봤으니까 코끼리는 어제 처음 발견된 거라는 식의 이야기는 좀 곤란한 것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그냥 수용해버리는 것은 그 ‘트렌드’와 ‘트렌드의 실체’가 속해 있는 총체적 문화상황에서 자신의 생활이 그만큼 멀어져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이야기이다.
신문을 덮고 TV를 끄고 근처 라이브 클럽을 가보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래왔듯 거기선 아직도 서서 공연을 즐기고 있다. 거기엔 수 천 년 전, 풍요와 생존을 기원하며 불을 피고 춤을 추고 탑을 돌고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행진하던 전통의식의 모습이 있다. 그래서 스탠딩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운 것’에 가까운 것이다.

Posted by HS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