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08 : Creator@Clipping - 카피라는 이름의 긴 여행, 데이비드 애벗 HSAD 공식 블로그 HSAD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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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카피 쓰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카피라는 이름의 긴 여행, 데이비드 애벗(David Abbott)
 
이 현 종 CD | CR2그룹
hjlee@lgad.lg.co.kr
 

 

이른 새벽 여관을 나오면서 보니
밤새 거리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잠시 꽃향기에 취해
길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콩나물 사들고 가던 중년 아낙
어디 아프냐고 근심스레 들여다본다.
해장국집으로 아낙네 따라 들어가
창 너머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본다.
창틀 아래 웅크린 아낙의 어깨를 본다.
하늘과 세상을 떠받친 게
산뿐이 아닌 것을 본다.

신경림, <산 그림자>

 
베루톨루치(Bernardo Bertolucci)의 영화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꽤 오래 전의 작품이라 영화의 기승전결은 오간데 없고, 다만 몇 마디 짧은 대사만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관광’과 ‘여행’의 차이를 물었던 사람한테 주인공쯤 되는 사람이 대답하는 장면인데, “돌아올 날을 정해 놓고 떠나면 관광이고, 돌아올 날을 정해 놓지 않고 떠나는 게 여행”이라고 하면서 길을 떠나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렇게 무작정 집을 나선 적이 있다. 젊은 날 가슴속에 있을 법한 숱한 물음표들의 꼬드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스팔트에 개구리 터져 죽듯 보기 싫은 상념들을 죄다 객사시키고 허허로이 돌아오리라 떠났던 로드 무비는, 사실 백일도 채 못돼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길섶에 주저앉아 있던 내게 복숭아 몇 알을 꺼내주며 배곯지 말라고 걱정해주던 할머니의 눈빛은 수십 권의 관념보다 강렬했다.
어느 시인은 노래한다.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거야 / 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 / 냅다 한번 뛰어보는 게 나을 걸 / 뛰다가 넘어져 보고 / 넘어져서 피가 나보는 게 훨씬 낫지 / 가령 <전망>이란 말, 언뜻 / 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보다는 / 나무 위엘 올라가 보란 말야, 올라가서 / 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
 
   
사람을 감동시키는 재주는 재주 이전에 삶에 대한 몸으로의 체득이요, 가슴 깊은 애정의 소산이다. 사람이 스승이고 세상이 학교인 것을, 나의 삶의 궤적이 글이 되고 카피가 될 때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말이 되고 카피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순간순간을 가볍게 보아 넘기지 않는 예리한 눈이 필요할 것이요, 세상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부대끼고 씨름하며 배우는 투사의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후에야 진정한 울림의 말이 찾아지는 것이리라. 아니, 그때 비로소 말이 내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배추와 죽순을 즐겨 그리던 중국 근·현대 미술의 최고봉 치바이스(齊白石. 1860~1957)에게 제자 하나가 배추 그림을 잘 그리는 비법을 물었다. 치바이스는 “네 몸에는 소순기(蔬筍氣: 푸성귀나 잡풀의 성분)가 없는데 어찌 나와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쇠똥 화로에 토란을 구워 먹으며 허기를 때웠던 유년의 기억과 경험이 가난한 백성들의 삶이 묻어있는 소재들을 그토록 절절하게 그려낼 수 있도록 그에게 눈과 가슴을 선물했던 것이다.
무엇인가 구하고자 하는 자는 절실해야 한다. 몸으로도, 영혼으로도…… 그리고 그 일은 당신 속의 수많은 앵무새들을 죽이는 일에서 시작된다.
 
글을 보면 글쓴이가 보이듯, 카피를 보면 카피라이터가 보인다. 얼마나 절실함이 담긴 카피인지, 얼마나 영혼이 담긴 카피인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데이비드 애벗(David Abbott)은 말한다. “당신의 일 속에서 혼신을 다해보세요. 그리고 당신의 삶이 가르쳐준 생생한 카피를 써보세요. 당신의 마음을 움직였나요. 그러면 가능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별로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이는 이 말을 타협 없이 실천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것도 일생을.
데이비드는 63년에 카피라이터로 입문해 DDB를 거쳐 본인이 세운 회사, AMV(Abbott Mead Vickers)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98년에 은퇴했다. 데이비드는 우리 시대 가장 존경받는 카피라이터로 첫손에 꼽히며 ‘품위 있는 설득의 대가’ 혹은 ‘long copy의 일인자’라는 찬사를 받아왔다. 그리고 수많은 카피라이터들이 빌 번벅(Bill Bernbach; DDB 창시자, 폴크스바겐 비틀 캠페인 지휘)의 후예라고 자칭하고 있지만, ‘빌 번벅의 유일한 적자는 오직 데이비드뿐’이라는 말로서 그의 위상을 되새겨 볼 수 있겠다. 요즘 데이비드는 소설을 쓰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카피 쓸 때 늘 저의 감정과 경험을 최대한 이용합니다”

 
저 자신을 표현하기에는 소설이 훨씬 유리하죠. 당연히 그런 분야니까요. 하지만 카피라이터였을 때에도 전 꽤나 저의 삶을 표현하는 쪽이었던 것 같아요. 제 자신의 감정, 그리고 경험들을 다른 카피라이터들보다 더 많이 사용했던 편이었습니다. 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말이지요. 전 여전히 그 방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신의 일부가 커뮤니케이션 속에 녹아 있을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을 만들 수 있지요.
그래서 전 카피 쓸 때 늘 저의 감정과 경험을 최대한 이용합니다. 아시다시피 시버스 리걸의 ‘아버지의 날’ 광고 있잖아요<광고 1, 2>. 아마 그게 가장 적절한 예일 겁니다. 하지만 물론 이런 자기고백적 커뮤니케이션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너무 감정적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얘기지요. 결국 밸런스의 문제인 것 같아요. 좀더 간명하게 말하고 지나친 감정을 자제해야겠지요.
 
 
모든 제품들은 싫든 좋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와 내가 갖고 있는 수 천 수 만 가지의 잉태된 욕망들이 밖으로 토해져 나온 모습들이 결국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아우성치는 그들은 어쩌면 내 욕망의 자식들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광고를 계량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을 로봇으로 볼 때나 가능한 얘기이다. 광고는 일종의 인간해부학이다.
 
‘아버지의 날’ 광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해 왔는데, 아마 그 광고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가 생각났기 때문이겠죠. BT의 커머셜에서도 유사한 예가 있어요. 거실에서 대학에 간 딸의 전화를 받은 아버지의 행동 말입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어, 그래, 잘 있었니. 엄마 바꿔줄게.’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전화 받으면 늘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수화기를 건네주는 사람. 아마 그런 사람을 표현한 것이겠죠. 그 광고에 대해서도 무척 많은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대부분 위대한 광고들은 인간의 행동과 반응, 그리고 관계들에 대한 일종의 통찰(insigh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번벅은, 예를 들어 ‘Ford'라고 말하지 않고 ‘We’라고 말을 했던 거지요. 훨씬 사적이고 인간적이지요. 조심스럽고 신중하기만 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일까? 어떻게 보면 지금 어떤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일하고 있는가를 주목해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누구의 말을 듣고 자라는가, 혹은 누구에게 자극 받으며 가슴에 칼을 품느냐에 따라 그 칼의 크기와 종류가 달라지는 게 현장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 안전하게 일하는 게 더 위험해요”

 
좋은 커뮤니케이터가 꼭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괴벨스는 굉장히 뛰어난 커뮤니케이터였고, 히틀러도 그다지 나쁘진 않았거든요. AMV에서 사람을 뽑을 때 특별히 신경 썼던 문제는 그 사람이 나이스한 사람인가 아닌가의 문제였습니다.
더 좋은 커뮤니케이터를 뽑고자 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함께 일하고 싶은 부류의 사람을 뽑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겁니다. 광고 일이라는 게 한 사무실에서 하루 열 대여섯 시간을 함께 부대끼는 일인데,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그 시간을 보내겠습니까?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자기 회사를 차리게 되는 거 아닐까요. 같이 놀 만한 사람들하고만 함께 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가끔은 아주 까다로운 사람들도 뽑았어요. 물론 불쾌할 정도로 그런 사람들 말고요. 고집이 좀 센 사람들 있잖아요. 제 생각엔 고집이 좀 셀 필요가 있어요. 제가 뽑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안전한 쪽보다는 위험을 무릅쓰는 쪽을 좋아했는데, 사실 위험을 무릅쓰는 게 위험한 게 아니라 안전하게 일하는 게 더 위험한 겁니다. 그래서 전 안전하게 일하는 사람은 절대로 뽑지 않았습니다.
 
낚시의 기초는 내가 좋아하는 미끼를 끼우는 게 아니라 고기가 좋아하는 미끼를 끼우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이 당연한 얘기 때문에 옥신각신하다 엉뚱한 데로 빠지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본다. 좀 쉽게 얘기해보면, 광고라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비싼 돈 내는 대신 속 시원하게 온 천하에 알리는 일이니, 광고회사로서는 당연히 그 지엄한 명령을 신주 모시듯 떠받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비스 정신에 너무 투철하다보면 광고주가 원래 바라던 바와는 외려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와 그들이 듣고 싶은 얘기와의 불협간극 때문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내 자식 얘기만 죽 늘어놓는 사람, 딱 질색이다. 광고회사의 존재 의미는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그들이 듣고 싶은 얘기’로 바꿔주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그 입장은 광고주보다 AE가 더 크고, AE보다는 크리에이터가 더 크다.
 
너무 약육강식의 경쟁 시스템으로 크리에이티브 조직을 운영하면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경쟁상대로만 보게 되고 그렇게 행동하게 됩니다. 물론 크리에이티브 조직을 운영하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경쟁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곳도 많으며, 성공도 톡톡히 거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제가 그렇게 원했기도 했지만,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는 평화로운 느낌으로 일하는 게 더 좋은 성과를 낸다고 믿고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를 하는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경쟁지향적이고 독립적인 사람들입니다. 각자의 재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좋은 광고를 만들어야 된다고 채찍질을 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늘 크리에이티브 연감들을 보며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에이전시들의 작업에 자극 받고, 더 좋은 걸 만들어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정말 좋은 광고를 만들어야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들에 신경 쓰거나 마음 상하지 않도록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는 은퇴할 때까지 카피라이터의 길을 고집했다. 관리와 경영 쪽의 일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는 본인이 직접 쓰는 걸 원했고, 좋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을 고용해 그들이 직접 어카운트들을 담당하도록 했다. DDB 런던 시절에는 그 유명한 폴크스바겐(Volks-wagen Beetle) 캠페인의 카피를 썼으며, 시버스 리걸, 그리고 볼보<광고 3, 4>, 이코노미스트지 캠페인<광고 5~7> 등을 담당하며 후배 카피라이터들에게 카피 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볼보의 실증형 광고들은 카피의 출발이 어디이어야 하는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고 3>의 볼보 광고에는 유명한 일화가 담겨져 있다. 원래 광고주에게 제시됐던 시안에는 차 밑에 아이가 누워 있었는데, 광고주가 수용하지 않자 데이비드 본인이 차 밑에 직접 눕겠다고 제안해 결국 광고주의 승낙을 받아냈다고 한다.

처음에 전 카피라이팅이 뭔지도 모르고 부서에 배치 받았어요. 그러니까 일단 배울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나중에 제가 뽑는 입장이 돼서는 지적 능력을 가장 먼저 봤습니다. 왜냐하면 카피를 쓰고 광고를 만들려면 우선 기본적인 지적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호기심·자세·의지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카피라이터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하고, 문장들의 연결이 긴밀하게 유지되는 법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역시 본인이 스스로 배우는 겁니다. 저 역시 혼자 <뉴요커> 지를 읽고, 다른 사람들의 광고를 보면서 공부하고, 크리에이티브 연감들에서 카피를 읽고 기억하면서 배웠던 게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밥 레븐슨(Bob Levenson)의 카피를 읽고 외우면서 운율이나 리듬 같은 걸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소설도 그런 식으로 배우고 있거든요. 어쨌든 카피에 관한 거면 무조건 포악할 정도로 읽고 배우고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카피라이터였을 때 카피 외의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책도 쓰지 않았습니다. 카피라이팅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지요. 다른 것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직 좋은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곳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카피는 일종의 오길비와 번벅의 아말감[합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제가 첨가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제 생각엔 굳이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가져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흔히 사람들이 “이거 내가 한 거야, 혹은 내 꺼야”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전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먹을 수 있을 만큼 고기를 잘라라’, 데이비드의 확고한 신념 중의 하나다. 카피가 길어야 된다, 혹은 짧아야 된다는 법칙은 없다. 적절하기만 하다면, 말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까지 쓰고 이야기를 다 했을 때가 바로 멈출 때라는 얘기다. 그에게 ‘단어들’이란 설득을 위한 봉사자들이며, 대체적으로 쉽고 심플하며 친근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광고에 내 삶이 녹아 있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을 넣을 수 있겠습니까?
 
AMV에는 문서로 돼 있지는 않지만 한 가지 철학이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담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예전에 스태프 미팅을 할 때였습니다. 거기선 저도 의견을 말하는 한 사람이었지요. 우리가 믿는 것들, 그리고 우리 회사가 어떻게 행동했으면 하는 가를 얘기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책으로 만들어져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진 적은 없습니다. 아마 정직하고 화합하며, 일을 가장 우선 하자는 것들이 원칙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다른 분들도 인정하는 부분인데, 그건 우리가 우리의 원칙을 그대로 실천해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린 큰 회사가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아침에 출근하고 싶은 회사, 그리고 함께 일하는 게 즐겁고 프라이드를 갖고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원했습니다. 광고회사에서의 재정적인 성공이란 어떻게 보면 좋은 광고를 만들겠다는 열정에 따라붙는 ‘보너스’라고 할 수 있지요. 빌 번벅이 그레이(Grey)사를 떠날 때가 49세였는데, 그 때 그가 썼던 편지를 한 번 읽어보세요. 그걸 보면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돈을 좇아 회사를 떠났던 게 아니었어요. 정말 이런 광고회사를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과, 이런 광고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본인의 회사를 차렸던 겁니다. 제가 투자자라면 이런 회사에 투자하고 싶을 겁니다.
우리는 늘 웃었습니다. 우울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우리는 회사가 나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신바람 나게 일했습니다. 임원들이 커다란 차나 타고 다니는 그런 회사가 아니라,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내가 재미있게 일하느냐입니다. 깎고 다듬어내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모든 시간들이 즐거운 일입니다. 구상을 하고, PT가 있으면 새벽 2, 3시까지 스튜디오에서 보내기도 하고, 카피를 쓰고, 회의를 하고, 광고주를 설득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들입니까. 전 되도록 재미없는 일은 피했습니다. 왜, 광고주 접대 같은 거 있잖아요. 대신 피터와 에이드리언이 좀 고생했지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해요. 그리고 서로에 대해 관용을 가져야 해요. 서로가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하구요. 서로가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회사에 나온 거잖아요. 누군가 차를 좋아하기 때문에 더 큰 차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했어요. 제가 원하는 건 차가 아니거든요. 누군가는 또 좀 긴 휴가를 원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그냥 너그럽게 이해하면 그만입니다. 동업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집사람이나 애인보다 더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지는 일도 참 많습니다. 서로를 시기하기 때문이죠.
 
30여 년을 동고동락하며 세 사람이 한 회사를 잡음 없이 꾸려나가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것도 광고회사를. 그러기에 AMV가 주는 교훈은 우리에게도 적지 않다. 특히 나와 다르다는 것에 대해 몰이해한 우리 사회의 습성을 보면 말이다. 똘레랑스(tolerance)의 결여는 결국 야만의 얼굴을 한다.
 
데이비드는 2001년 크리에이티브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다.
 
광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늘 광고와 친하게 지냈을 뿐이에요. 하지만 광고 속엔 제 삶이 녹아 있습니다. 광고에 내 삶이 녹아 있지 않다면 도대체 그 광고 속에 무엇을 넣을 수 있겠습니까?

Posted by HSAD